인연이 시작되다.
1988년, 서울올림픽의 열기가 가득했던 가을. 나에게도 인생을 바꿀 일이 벌어졌습니다.
1988년 9월 24일 첫 맞선을 봤습니다.
1988년 11월 27일, 만난 지 65일 만에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번갯불에 콩 볶아 먹는다는 속담처럼.
어느 날 퇴근하고 집에 오니 엄마가 뜬금없이 "선 볼래?"라고 물어보셨습니다.
20대 중반에 들어선 난 '선'이란 건 나이 든 노처녀들이 보는 거란 선입견에 엄마한테 무슨 선 이냐며 싫다고 했습니다.
며칠 뒤 엄마는 "요 앞에 약국 할머니가 집으로 오셔서 막내아들과 큰 딸 선보게 하자고 여러 번 찾아오셨다"라는 말씀을 하시며 자꾸 찾아오시니 그냥 한번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 우리 집 마당엔 대추나무가 있었고 대추나무가 있던 마당 앞 골목 끝 큰 길가에 약국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버지랑 엄마는 약국에 가끔 가는 손님이었습니다.
그 당시엔 의약분업 전 이어서 조금 아픈 건 약국에서 조제해서 먹기도 하던 때라 가끔 들리시는 곳이었습니다.
나중에 시어머님이 얘기하시길 "난 너의 친정엄마가 얌전하시고 아버지도 점잖으셔서 선 보자고 한 거지 너에 대해 미리 알아보고 보자고 한 거 아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막내아들과 큰딸을 선보게 하자고 해서 저를 알고 계셨나 했었는데 아니었던가 봅니다.
어찌 됐든 아버지도 한번 보라고 등 떠미셔서 맞선을 보기로 했습니다.
맞선을 보기 며칠 전, 엄마가 말씀하셨습니다.
약국 할머니가 또 오셨는데 "막내아들이 다 괜찮은데 만나보고 키 작다는 얘기만 하지 말아 줘요"라고 부탁을 하셨다는 겁니다.
그 당시 난 적어도 키가 175cm 이하 남자는 만나지도 않겠다 다짐하고 있었는데 내키지도 않는 선을 보러 가는데 키 작은 남자란 얘기를 듣고 오기가 생겨 굽이 7cm인 구두를 신고 또각또각 만남의 장소로 갔습니다.
맏이인 나에게 맞선을 보라 하신 아버지도 걱정이 되셨는지 추석연휴라 엄마와 큰댁에 가려고 온 사촌 올케언니와 엄마까지 동행을 시키셨습니다.
약속장소에 가보니 군청색 양복을 입은 까무잡잡한 남자가 앉아있다가 일어나는데 난 속으로 '일어난 거야? 앉은 거야?' 하며 앞에 가서 앉았습니다. (그렇다고 남편의 키가 아주 작은 건 아닙니다. 키 큰사람은 싱겁다는 옛 어른들 말씀처럼 남편은 야무지고 뭐든 잘 만들어내는 맥가이버 같은 남자입니다. 결혼 후 시어머님 말씀이 "남자 키 큰 거 결혼식장 들어갈 때뿐이다."라고 하셨는데 살아보니 맞는 말씀 같습니다.)
사촌 올케언니와 엄마는 인사와 짧은 대화 후 자리를 비켜 주시고 둘이 얘기를 했습니다.
어른들 입장 곤란하게 하지 않으려고 나온 자리이다 보니 수줍어하지 않고 이런저런 얘기를 편하게 했습니다.
얘기를 하다 보니 맞선 남이 키 작은 거 빼곤 인상도 괜찮고 얘기도 요즘말로 티키타카가 잘 맞았습니다.
예의상 며칠 뒤 한 번은 더 보기로 하고 헤어졌습니다.
집에 돌아오니 우리가 만나고 있는 사이 맞선남의 어머니가 떡을 해서 가져다 놓고 가셨습니다.
집에 있던 동생이 영문도 모르고 떡을 받아놓은 것입니다.
맞선 본 첫날 맞선이 성공일지 실패일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미 떡을 받아버렸습니다.
아버지는 사촌 올케언니의 안목을 믿고 계셨는데 사촌 올케언니의 눈에 잘 보였는지 아버지에게 맞선남에 대해 좋게 얘기했고 엄마도 괜찮아 보인다 하셔서 아버지도 싫지 않은 눈치셨습니다.
좀 더 알아볼까 하는 마음으로 두 번, 세 번의 만남을 가졌는데 세 번째 만남이 있던 날 시어머님은 우리 집으로 찾아오셔서 날 잡자는 얘기를 하셨습니다.
난 맞선남에게 세 번 만났는데 무슨 결혼얘기가 나오냐고 따지듯 물으니 맞선남 왈 "그냥 하죠!" 대수롭지 않은 듯, 그렇지만 결단력 있게 얘기하는 맞선남의 모습에 조금의 믿음이 생겼습니다. 멋진 프러포즈도 없고(그 당시에 요즘같이 날 잡아하는 프러포즈는 같은 건 없었던 것 같지만) 서로를 알아갈 만큼 여러 번의 만남도 갖지 않았는데 뭘 보고 결혼하자는 얘기를 했을까요? 무슨 생각이었을까요?
맞선남의 부모님이신 노부부가 약국을 하며 성실하게 생활하시는 모습을 본 저의 부모님은 심성이 좋으신 어르신 같다며 집안은 괜찮은 거 같다고 얘기하시고 맞선남의 어머님은 저의 부모님이 가끔 약국에 방문하시면 이런저런 얘기도 하시고 동네에서 지켜보시기도 했었나 봅니다.
양쪽 어머님의 중매로 연애다운 연애도 못해본 난 인생 첫 맞선으로 한 달 뒤 상견례 겸 약혼식을, 만난 지 65일 뒤 결혼식을 하게 됐습니다.
함 들어오는 날, 약국에서부터 시작된 함 팔이는 골목을 떠들썩하게 하며 골목 안쪽 대추나무집까지 요란하게 들어오며 약국집 막내아들과 대추나무집 큰딸의 결혼을 알렸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말처럼 순간의 선택을 하고 두 달 만에 한 결혼이지만,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간 저희 부부는 신혼부부들만 모은 패키지여행에서 7~8년 정도 사귀고 결혼했냐는 얘기까지 듣는 케미 좋은 부부로 신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