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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벤트의 여왕

쑥스럽지만 기쁘게

by Lydia young

"엄마, 나 내려오는 거 잘 봐야 해!"

"알겠어! 여기서 보고 있을 테니 조심히 내려와!"

작은 딸이 10살 때 스키장에서 스키 타고 내려오는 모습을 꼭 지켜보라고 신신당부하는 말입니다.

나는 순간을 놓칠세라 슬로프를 뚫어져라 바라봅니다.


잠시 뒤, 형광 핑크 스키복을 입은 작은 딸이 내려오는 모습이 보입니다.

초보 스키어인 작은딸이 하얀 눈 위에서 눈에 잘 띄라고 핑크색으로 골랐습니다.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내며 내려옵니다.

많은 사람들 사이 눈에 잘 띄는 형광 핑크 꼬맹이가 내려옵니다.

넘어지고 일어나는 여러 번의 도전 끝에 드디어 활강 성공!

딸의 성공을 함께 기뻐해 줍니다.


칭찬과 격려 그리고 넘어짐과 일어섬의 반복 속에 사랑 많은 아이로 자랐습니다.

작은 딸은 우리 가족 이벤트의 여왕이 되었습니다.


작은딸이 초등학교 3학년 때 일입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밑으로 발을 내디디려는 순간 발 밑에 뭔가 있었습니다.

하트 모양의 색종이가 화살표 모양으로 깔려 있는 거였습니다.

따라서 나가보니 거실 바닥에 편지가 놓여 있었습니다.


우리 부부의 결혼기념일을 축하하는 이벤트였습니다.

가끔은 이벤트 속에 사심이 들거나 푸념도 있긴 했지만요.


예를 들면, 엄마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편지 속에 자기 휴대전화를 새것으로 바꾸고 싶다던가.

아빠의 생일에 요즘 공부가 잘 안 돼서 성적이 좋지 못하니 이해해 달라는 등의 귀여운 푸념도 포함되어 있었지요.


작은 딸의 이벤트는 그 후로도 계속 우리 가족에게 활력소가 되었습니다.


또, 대학교를 졸업하고 첫 월급을 탄 딸은 우리 부부에게 감사패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어려운 형편에 공부하고 힘들었을 딸의 깊은 사랑에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했었습니다.


집안의 대소사에도 플래카드와 소품을 이용한 이벤트들이 다양하게 있었습니다.

친정엄마의 생신에 온 가족이 하트 머리띠하고 사진 찍기도 있었습니다.

데면데면한 성격에 쑥스러워 사랑해 소리도 못하는 친정식구들은 질색하며 손사래를 치지만 작은 딸은 꾸준히 도전합니다.

친정 식구들도 요즘은 그런 이벤트에 기뻐하며 적극 참여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이런 이벤트의 감성은 사랑꾼 아빠를 닮은 듯합니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작은 딸은 동료 교수들이나 학생들도 살갑게 챙깁니다.

나는 "뭘, 그렇게 까지 하니?"라고 차갑게 얘기하지만 딸의 기쁨인 것 같습니다.

사랑 많고 정 많은 사람으로 자란 것이 대견하고 기특합니다.


살면서 진심으로 베푸는 호의에도 내 맘 같지 않게 상처를 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간혹, 호의가 권리인 줄 아는 사람들도 있을 테고요.

그럴 때마다 딸 특유의 긍정 마인드로 잘 이겨나갈 수 있을 거라 믿어봅니다.


평상시 쑥스러워하지 못하던 말을 전해봅니다.

"딸, 아빠 엄마의 딸이라는 게 우리에겐 가장 큰 이벤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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