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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숙 Oct 22. 2023

정류장과 종착역

삶의 전환점

초등학교를 막 입학했을 때 나는 언니와 오빠가 다니는 학교를 다니기 위해 버스를 타고 다녔다. 엄마는 잃어버리지 말라며 양말목에 종이돈으로 동전을 싸서 넣어 주신다. 집에 올 때 차비였다. 학교에서 아이들과 한참을 운동장에서 뛰어놀다 보면 그 돈은 어느새 발바닥으로 들어가게 된다. 집에 올 때 차비를 양말바닥에서 꺼내 주면 차장언니가 인상을 찌푸렸던 기억이 난다. 


몇 개의 정류장을 그렇게 지나서 목적지인 집으로 올 때가 제일 좋았다. 나와는 세 살 차이가 나는 작은 언니 교실 앞에서 기다리다가 언니가 끝나면 언니의 손을 잡고 집으로 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언니는 정말 예뻤다. 책받침 그림에 나오는 눈과 코 입으로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없었다. 반드시 다시 한번 돌아보았다. 학교에서도 언니의 관심을 끌고자 하는 남학생들이 많았다. 언니는 전교 부회장이었기에 늘 선생님의 잔 심부름이 많았다. 난 언니가 자랑스럽고 무척이나 좋았다.


그런 언니와 함께 집에 오는 것은 나의 일과 중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 난 언니를 기다리는 것이 좋았다. 남학생들이 언니에게 장난을 치는 것을 내가 막아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언니를 보호해 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옷과 머리 모양을 언니와 언제나 똑같이 해주셨다. 남학생들은 나와 언니를 뒤에서 보면 헛갈려했다. 그래서 언니에게 하려 했던 장난을 내게 하면 그때는 그 남학생들이 나에게 맞는 날이 된다. 그렇게 몇 번 당한 학생들은 항상 얼굴을 확인한다. 그런 내가 언니 곁에 있으면 남학생들이 언니에게 장난을 할 수 없었다. 난 그것이 좋았다. 


그렇게 함께 했던 언니와 나는 다른 길을 가게 되었다. 언니는 중학생이 되었고 난 여전히 초등학생이었다. 그리고 우리 집이 이사를 해서 난 더 이상 버스를 타지 않아도 되었다. 언니는 만원 버스를 타고 학교를 다녀야 했다. 여자 중학교라서 남학생들의 짓궂은 장난은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후로 언니와 같이 학교를 다니는 일은 없었다. 늘 다른 길이었다. 


집에는 피아노가 있었다. 언니는 집에서 틈틈이 피아노를 쳤다.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쳤던 언니는 하루의 시작을 두 손을 보며 시작을 한다. 잠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는 두 팔을 쭉 뻗어 올리고 손을 올려다본다."오늘은 손의 표정이 좋구나." 그렇게 얘기할 때면 그날은 컨디션이 아주 좋은 상태이다. 그러나, "오늘은 손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네." 이런 날은 드물지만 그런 날은 많이 웃지 않는다. 난 은근히 언니의 그런 날이 신경 쓰였다. 


별명이 원더우먼이었던 언니는 운동도 잘하고 공부도 언제나 상위권이었다. 그런데다 피아노의 실력은 선생님들이 놀랄 만큼의 수준이었다. 음악시간에는 언제나 언니가 피아노 앞에 앉게 되었다. 선생님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학교 생활을 하던 언니가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는 선생님의 권유로 현악반에서 챌로를 배웠다. 

내가 배우려고 샀던 바이올린은 작은 언니의 손에서 길들여졌다. 언니가 피아노 앞에 앉아 있거나 챌로를 연주를 할 때면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언니의 10대 20대 초반까지의 모습은 아직도 내 머리에 그대로 살아있다. 30년을 훌쩍 넘긴 세월이 흘렀지만 생생한 모습은 그 시간으로 나를 돌려놓는다. 언니의 정류장은 몇 개나 되는 것일까? 너무도 일찍 종착역을 만나 기억 속에서 그리움으로 남은 언니이다. 


그런 작은 언니를 생각해 본다. 언니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생긴 피부암으로 학교를 중퇴하고 검정고시로 졸업장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를 갔다. 2년만 다닐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언니의 뜻대로 정말 딱 2년간 다니고 결국은 종착역으로 들어갔다. 투병을 하면서 극도의 불안과 고통을 느끼면서도 언니는 공부를 계속했었다. 그리고 언니가 좋아하는 피아노와 첼로를 연주했었다.


그런 언니가 만났던 첫 번째 정류장은 길을 지나다 들은 피아노소리였을 것이다. 그 소리에 언니는 어렸지만 발걸음을 멈추고 움직이지 않았었다. 엄마는 언니의 그런 모습을 보고 언니와 함께 그 피아노소리를 따라 들어갔고 그곳은 가정집에서 피아노를 가르치는 곳이었다. 언니는 그날 이후 그 피아노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그때 언니는 초등학교2학년이었다. 엄마는 언니를 위해서 계를 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 우리 집에는 피아노가 들어오게 되었다. 우리는 그 피아노 소리를 늘 들어야먄 했다. 잔잔한 정류장을 몇 개 더 지나고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첼로를 배우게 된 것이 또 하나의 큰 정류장이었을 것이다. 언니가 최고로 행복한 모습을 보였던 때였다. 이화여고를 다녔던 언니는 교복이 참 잘 어울렸다. 그런 언니가 첼로를 연주하는 모습은 정말 환상이었다. 



작은 언니는 언제나 내게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예쁜 데다가 공부도 잘하고 철봉을 비롯해 운동도 잘했던 언니였다.  피아노와 첼로 그리고 나의 바이올린까지도 모두가 언니의 손에 들어가면 묵직하기만 했던 것이 아름다운 음을 통해 세상에 다시 태어났다. 난 그것이 너무도 신기했다. 그런 언니를 보면서 참 많이도 부러웠다.


그러던 언니는 피부암이라는 달갑지 않은 세 번째 정류장을 만나면서 최고의 시련을 겪게 되었고 그 속에서 다시 꽃을 피우기 위해 노력을 했다. 그리고 결국은 이화여대를 2년간 다니다가 언니의 종착역과 마주했다. 비록 짧았지만 아름다웠던 삶을 살았던 언니... 많이 보고 싶다. 지금은 내가 많이 늙어버려서 언니가 알아보지 못하겠지만...


내게 남는 언니의 모습은 아름답고 활기찬 모습으로 가득 차있다. 언니의 짧은 삶은 아름다운 음률에 물들어한껏 행복했었으리라 생각된다. 피아노는 어린 언니의 마음을 부풀게 했고 그 속에서 언니는 상상의 모든 것을 만났으리라.  쇼팽과 베토벤, 슈베르트, 하이든을 좋아했다. 그중  평생 피아노 곡만 썼다던 쇼팽을 특히나 좋아했다. 언니는 그들이  준 선물로 그 안에서 그들과 늘 함께하듯 살았다. 그렇게 행복해하는 언니는 정말 아름다웠다. 


언니가 투병하던 시간과 죽는 그 순간 까지도 함께했던 나는 언니의 아름다움만을 기억한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들여다보는 그 순간 "이젠 됐다."라는 말로 눈을 감았던 언니는 무엇이 되었다는 것인지 난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말한 언니의 얼굴을 참으로 평온해 보였기에 난 슬퍼도 슬프지 않았다. 나의 눈물은 그저 언니와의 이별이 너무 빨랐다는 것에 대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내게도 그 사이에 여러 개의 정류장이 다가왔다. 조용하고 아늑한 정류장을 지나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는 정류장을 만나기도 했다. 지치고 지쳐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기를 포기하고픈 순간에는 잠시 정류장을 거부하며 종착역을 부르고 싶었다. 그런 나를 책망하며 다그치고 일으켜 앞으로 나아가기를 반복했고 그렇게 또 다른 정류장을 만났을 때 나는 겨우 한숨 돌릴 수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각기 다른 정류장들을 만나면서 자신만의 삶으로 그림을 그려 나가고 있다. 그 그림은 헤아릴 수 없는 수만큼 다양하다. 중간중간 우리의 삶에서 만나게 되는 정류장은 삶의 변화를 주는 계기를 만든다. 어린 시절 부모에 의해 만나게 되는 정류장은 어쩌면 포근할 수도 있겠지만 가혹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성인이 되어 가는 과정에서 본인의 선택으로 만나게 되는 정류장은 생각보다 수월한 길로 가는 경우도 있겠지만 휘몰아치는 비바람을 만나게 되는 길로 안내하기도 할 것이다.


우리는 나의 인생의 전환점을 가져다주는 정류장을 만나는 그 순간을 눈치채지 못한다. 그러나 지나고 나서 보면 그때의 그 순간으로 자신의 삶이 바뀌었음을 알게 된다. 우연하게 만나게 된 사람에 의해서 나의 생각이 바뀌고 그래서 삶의 방향이 바뀌기도 한다. 시시때때로 변화를 가져다주는 만남이 있고 그런 만남이 인생의 정류장이라 생각된다. 그렇게 많은 정류장들을 지나서 지금의 삶이라는 그림을 그렸고, 그러다가 결국은 어느 순간 종착역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 순간이 오면 나는 후회하는 말을 남기고 싶지 않다. 


비뚤어진 그림을 그려왔더라도 마지막이 오면 나의 그림은 나름 볼만한 그림이 되어 마무리가 되기를 바란다. 내가 그려왔던 그 그림은 굳이 말을 하지 않더라도 내가 사랑하는 나의 아이들에게는 제대로 읽힐 수 있으면 좋겠다. "너희들을 너무 사랑한다는 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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