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이 꺼져있어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 큰딸의 전화기에 이어 어찌 된 일인지 외손자 서진이의 전화기도 꺼져있었다. 여태까지 딸의 전화기는 꺼져있을 때가 거의 없었다. 이상하다?
여러 날 통화를 못했긴 해도 딱히 궁금했던 건 아니었다. 단지 해가 바뀌어도 엄마한테 전화 한 통화쯤 해줄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아서 잠시 괘씸한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아니다. 너희들이 선물이라고 했지. 평생 누려야 할 행복을 태어나 준 것만으로 이미 다 준 거야.라고, 찰떡같이 했던 말을 잊었나? 누가 먼저가 뭐가 중요해. 보고 싶으면 엄마가 먼저 하면 어때. 내가 전화하면 되지 뭐.
그런데 연결음을 듣는 순간, 괘씸한 생각은커녕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전화를 안 받는 것과 전원이 꺼진 것은 달랐다. 이럴 때 일반전화가 없는 것이 답답했다. 도대체 전화기는 왜 꺼진 거야!
짬만 나면 게임을 즐기는 손자 녀석 휴대전화기까지 꺼져있어서 걱정이 차츰 쌓이고 있었다. 그렇지만 일하고 있을지도 모를 사위한테 까지 전화하기는 망설여졌다.
이런 일이 없었는데. 갈등하다가 만지작거리던 휴대전화 번호판에 사위 번호를 눌렀다. 역시 전원이 꺼져있었다. 어? 정말 어떻게 된 거야! 이제는 큰딸의 소식을 들을 수 있는 통로는 없었다. 막막했다.
그렇다고 가까이에 사돈이 계시지만, 통화가 안 된다고 사돈께 전화하는 것은 어른답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는 사이에 머릿속은 작은 걱정이 큰 걱정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외국으로 가족 여행? 그러기엔 휴일이 길지 않다. 연말 연휴 때 외국이나 제주도 여행을 갔었지만, 연락 없이 떠나진 않았었다. 마음속에는 걱정이 깊게 쌓여갔지만, 남편 앞에서 내색하지 못했다.
내일 서진이가 학교 가야 하는데, 목요일 저녁 8시 30분 지금 이 시각까지 연락이 왜 안 되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책을 읽고 있어도 눈으로 스칠 뿐 머릿속에 입력이 되지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떠돌다 한 시간이 지났을 때쯤,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 전화했었네?” 태연한 척,
“응, 가족이 다 전원이 꺼져 있어서 무슨 일이 있나 싶었지.”
딸 가족들은 설 연휴를 이용해서 제주도 여행을 마치고, 그 시각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에 있었다. 사위의 일정이 변경될 수 있지만, 제주도 여행을 간다는 말을 했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나는 깜쪽같이 잊고 있었다.
“엄마, 비행기 모드로 바꿨는데.”
전원을 끄지 않고 비행기 모드로 바꾸면 전원 꺼짐 알림으로 알려준다는 것을 나는 이제야 알았다. 여행 간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면 하지 않아도 될 쓸데없는 걱정을 한 것에 웃음이 나왔다.
전원 꺼진 전화기 연결음에 스친, 지나친 걱정이 불러온 또 다른 걱정거리가 연속되어 피로감이 몰려왔다. 가끔 어른 된 자식들을, 놓은 것 같아도 이번처럼 그렇지 못할 때가 있다.
우리 큰딸 가족들이 여행을 무탈하게 잘 다녀온 것만 해도 감사할 일이다. 새해에도 쭈욱 지금처럼 행복하게 잘 살아가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