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무렵, 잠시 배터리가 방전된 사이에 큰오빠의 부재중 전화가 남겨있었다. 가끔 안부를 묻는 전화가 오지만 오늘따라 전화기에 남은 부재중 문구가 특히 신경이 쓰였다. 큰오빠에게 재빨리 전화번호를 누르는 짧은 순간에도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몇 번이고 오락가락했다.
"오빠, 잘 계셨어?"
"잘 있지. 그런데 전원이 꺼져 있어서 걱정했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지?"
짧은 순간에 오빠와 나는 동시에 같은 생각을 한 것이다. 8남매 중 유일하게 형제들과 멀리 떨어져 사는 나이 먹은 여동생이 아직도 걱정되는지 늘 나보다 먼저 전화해서 안부를 묻는다.
나도 왠지 오늘따라 잠깐 걱정됐던 것도, 큰오빠 나이가 어느덧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연세가 가까워져서 그랬던 것 같다. 혹시 아프다는 소식이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덜컥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주로 낮에 통화했었기에 평소와 다른 저녁 시간에 뜬 부재중 전화가 문득 걱정을 앞세웠던 것 같다. 믿고 싶지 않지만, 큰오빠도 이제 노인이 되어 있었다.
나의 두 오빠는 지금까지 추억 속의 오빠에 머물러 있어서일까. 오빠들도 늙어 가고 어느덧 노인이 되었다는 것을 미처 생각지 못했다. 그래선지 큰오빠도 여전히 그때의 동생으로 기억하는지도 모르겠다.
오빠들 따라다니며 귀찮게 굴던 동생도 사위와 손주들을 거느린 할머니가 되었다. 철없이 천방지축 대던 그때가 엊그제 같은데 참 세월도 빠르다.
오빠의 밝은 목소리가 아주 잠시 걱정이 휩싸였던 짧은 시간을 지우개로 지우듯이 말끔히 지워버렸다. 하지만 나는 이내 오빠들과 보낸 어린 시절의 추억이 몽글몽글 피어난다.
나는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는 남자 형제들 틈에 고명딸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삼형제분 모두 아들은 많은데 딸이 귀했다. 중학교 입학하고 막내 여동생이 태어날 때까지는 통틀어 큰집 언니와 두 명뿐이었으니 형제들 틈에 아버지 믿고 권력을 부릴만했다.
오빠들은 무뚝뚝하고 엄격하셨던 아버지께 자기주장을 올바로 펴지 못하고 어눌했다. 가끔 아버지 승낙을 얻기 위해 눈치보며 조바심 내는 오빠들과 짜고, 나의 필살기인 애교작전으로 결과를 얻어내던 일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오빠들이 결혼하고 나서도 올케들이 그와 비슷한 상황이 되면 시누이인 나를 아버지한테 밀어 넣어 승낙을 얻거나 안심시켜 드리려고 했던 일들이 빈번했다. 어쩌면 해결사 노릇을 자처했던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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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두 오빠 따라 썰매 한번 얻어 타겠다고 선머슴처럼 졸졸 따라다니던 철없던 때를 생각하고 웃는다. 성가시다고 뿌리치는 두 오빠를 붙어서 기어코 따라다니며 귀찮게 했었다.
국민학교 1학년쯤이었다. 몸이 약해서 같은 학급 친구의 괴롭힘에 학교 가는 것을 두려워하던 때에는 큰오빠 손잡고 학교 갈 때도 있었다. 순둥이 오빠였지만 그래도 친구들에게는 겁나는 대상이었으니까.
어느 한겨울에는 국민학생인 개구쟁이 두 오빠가 마루 끝에서 벌벌 떨면서 두 손 들고 벌서고 있는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된다. 그때는 어려서 무슨 이유인지 잘 몰랐다. 단지 아버지가 너무 야속했고 오빠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했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내가 아직도 그 기억 속의 오빠들로 가슴 아파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것이다. 아마 오빠들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거나 기억한다고 해도 어린 시절 추억쯤으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버지 믿고 특권? 누렸던 것도 13살 터울인 여동생이 태어나면서 깡그리 사라졌다. 아주 자연스럽게 막내 여동생은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내 등 뒤에 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안 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여동생을 등에 업고 놀아야 하는 신세가 돼버린 거다.
잠시도 떨어지지 않는 여동생 때문에 친구들과 노는 즐거움도 오래가지 못했던 것 같다. 오빠들을 귀찮게 했던 것을 막내 여동생으로부터 고스란히 물려받아 겪게 되었다.
바쁜 엄마를 대신해서 여동생을 돌볼 수밖에 없었다. 여동생은 귀엽고 예쁜데, 애교도 많아서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초등학교 입학식 날, 단발 펌에 예쁜 드레스 입고, 아버지 손잡고 함께 사진 찍던 생각도 많이 난다. 어제 일 같은데 아련하다.
여동생이 결혼할 때, 연세 드신 엄마를 대신해서 이바지 음식을 해줄 때는 엄마 같은 마음이 앞서서 뭐라도 해주고 싶어 애를 썼던 것 같다. 그랬던 동생이 오십이 넘어도 여전히 어린 동생으로 남아있으니, 내가 결혼할 때도 엄마도 그러셨겠지.
또 큰오빠도 그런 마음으로 멀리 떨어져 지내는 동생을 생각하며 안부를 물어오는 것으로 생각된다.
"오빠, 미안해요. 맨날 나보다 먼저 전화해 주니 염치없어."
"누가 먼저 하면 어때. 저녁 먹고 잠깐 네 생각이 나서 전화했어."
어떡하나. 갑자기 눈물이 앞을 가리니 창문에 흐르는 빗물 같다. 코도 맹맹해지고, 태연한 척 통화를 끝내고 나서도 눈물이 주체가 안 되었다. 아마 오빠도 눈치를 챘지 싶다.
어버이날이 가까워지니 오빠도 부모님이 생각났던 걸까. 내가 오빠와 통화를 하면서 부모님을 생각했듯이 오빠도 비슷한 마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다가오는 어버이날에는 아버지 엄마께 하얀 카네이션을 달아드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