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끝까지 조선을 살았다
낡은 목재 서랍을 열다 우연히 오래된 엽서를 발견했다. 잉크는 바랬고, 종이는 손때가 묻어 있었지만, 그 문장 하나만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기억은 남는다. 끝났어도, 계속된다.”
그 말을 본 순간 떠오른 건 드라마 하나였다. 벌써 7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그 이야기.
‘미스터 션샤인’이었다.
처음엔 호기심이었다. 시대극인데도 영상이 근사했고 음악은 서늘하게 아름다웠다. 인물들은 무겁고 대사에는 쉼표보다 말줄임표가 더 어울렸다. 낭만이라기보다 결의에 가까웠다.
드라마는 1900년대 조선을 배경으로 했다.
버림받은 소년 유진 초이는 조선을 떠나 미국 해병대 장교가 되어 돌아왔다. 조국을 등졌던 그가 다시 조선을 마주한 순간, 고애신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조용한 얼굴 뒤로 총을 숨기던 그는, 밤마다 독립운동가로 살아갔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봤다.
애신은 조국을 사랑했고 유진은 그런 애신을 사랑했다.
그러니까 유진에게 조국은 애신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드라마는 단지 둘만의 서사가 아니었다.
그 주변에는 또 다른 무게들이 자리했다.
구동매.
백정의 아들이었다. 사람이라 불리지 못한 아이는 일본 무신회를 배워 칼잡이가 되었고 조선을 증오했다.
그럼에도 애신 앞에서는 가장 순한 눈을 했다. 조선을 미워하면서도 그 조선 안에 있는 누군가를 위해 목숨을 던졌다.
김희성.
양반가 자제로 태어났지만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일 줄 알던 남자. 그는 처음엔 애신의 약혼자였지만 점차 사랑하는 애신을 위해 자신의 길을 찾는다. 말 많고 웃음도 많았지만 그 안엔 씁쓸한 지식인의 고뇌가 있었다. 서양식 교육과 조선의 몰락 사이,\ 그는 갈라진 틈을 껴안았다.
그리고 쿠도 히나.
글로리 호텔의 주인이자 조선과 일본 사이에 선 여인.
그는 사랑보다 생존을 먼저 배웠고, 감정보다 정보를 먼저 다뤘다. 그러면서도 누구보다 강단 있고 아름다웠다. 그의 하이힐 소리는 매회 가장 단단한 발자국처럼 들렸다.
이들은 서로 얽혔고 각자의 방식으로 저항했다.
누구도 쉽게 울지 않았고 누구도 쉽게 사랑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감정은 조용히 그리고 깊게 스며들었다.
드라마가 끝나갈수록 나는 자주 멈춰보게 됐다.
눈빛 하나, 대사 하나가 무겁게 가슴을 눌렀다.
한 사람이 떠나가면 깊은 쓴 말이 남았고
한 장면이 끝나면 그 장면 속의 시간들이 내 안에 머물렀다.
결말은 아름답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진짜였다.
누구도 완전히 웃지 않았고, 누구도 온전히 살아남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이 끝까지 지킨 건 기억, 의지, 그리고 선택이었다.
‘미스터 션샤인’은 조선이라는 땅 위에 사람을 그렸다.
사람들의 상처와 망설임, 분노와 연민이 겹겹이 쌓인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의 힘은 시간이 지나도 바래지 않았다.
세상은 매일 바뀌지만 어떤 기억은 제자리에서 견디며 남는다.
나는 가끔 ‘글로리 호텔’을 떠올린다.
전쟁처럼 격렬했던 감정들과
그 안에서 끝내 말하지 못했던 사랑들.
그곳은 늘 밤이었다.
그 밤은 차갑기보단 단호했다.
이야기 하나가 끝나도 그 결은 남는다.
그 시절, 그 마음들, 그들의 선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