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의 다정

by aa

불안은 정오의 그림자를 질질 끌며

한때 ‘우리’였던 이름을 더듬습니다


낡은 지붕 틈 사이,

계절은 조용히 접히고

우리는 문장도 되지 못한 채

반쯤 지워진 시로 살아가겠지요


돌이킬 수 없는 날들만을 골라

자꾸만 되돌아보게 되는 건

그때의 내가 아무것도 모른 채

여름을 사랑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별은 늘 떠남에서 시작되고

누군가는 텅 빈 자리에 오래도록 머뭅니다


지리멸렬한 나날 속에서조차

우리는 유일한 황혼처럼 아름다웠고,

다정은 때때로 가장 잔인한 이별의 이름이 되며

침묵은 그 무엇보다 깊게 마음을 찌른다는 사실을

나는 아주 늦은 밤에 깨달았습니다


혹시 기억하시나요

우리가 서로를 껴안으며

끝내 가장 깊은 곳부터 천천히 무너지던 밤을.


사랑이 곧 익사일지라도

나는 기꺼이 우릴 가라앉힌 그 밤을 다시 껴안을래요

우리를 죽일 수 있는 건, 우리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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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목, 금,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