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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싶었지만, 잘살고 싶었다.

자살시도를 했다

by 윤 슬


언제부터 일까?
문득문득 이를 악물고 있음을
인지한 게..
그렇게 살아온 걸까?
자연스럽게 살자꾸나
이 악문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더라.


사십 대 초반의 나는 혼돈의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기도 했고, 외모는 어느 때보다 빛나 보인다는 소리도 들었었다. 미용실 직원으로 10년 차가 지나가게 되니 슬슬 개인샵오픈을 고민했었고, 쫄보인 나는 시작도 해보기 전에 겁을 먹고 있었다. 아무도 대신해주지 않는다는 건 기정사실이었고, 젊은 직원들과 계속 함께 하기는 쉽지 않을 거란 것도 알고 있었다. 그 당시엔 시내 미용실엔 최고로 나이 많은 사람이 사십 대 초반이었고 보통은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 초반이 가장 많이 근무하고 있었을 때이다, 물론 동네 안쪽으로 들어가 보면 사십 대 직원들도 종종 있긴 했었다.

첫 미용실은 집에서 가까운 곳에 자본도 얼마 들이지 않고 시험 삼아 운영해 보겠다고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원래 있던 집기들에 권리금만 조금 주고 몸과 내 장비들만 들고 들어가 영업을 시작했다. 첫 가게는 천여만원으로 시작을 했다.

상권분석이나 매출을 얼마나 올릴 것인지 고민해보지도 않고, 그저 내가 받던 월급정도만 가져가면 되겠지, 하고 욕심을 내려놨었다. 욕심을 부리고 살만도 한대, 이건 나의 단점이자 장점일 수도 있다.

미용을 처음시작 할 때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손님들과의 소통이었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고 나면 도통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스텝 때는 디자이너 선생님들의 대화법도 귀 기울여야 하고, 슬쩍슬쩍 기술도 익혀야 해서 정신이 아득 했었고, 몸은 천근만근이었다. 디자이너를 달고 난 후에는 직접 손님과 시술상담을 하며, 일상적인 대화를 자연스럽게 끌어나가야 했었다.

시간이 지나 어느 정도의 경험치가 생기면, 힘들었던 소통문제도 자연스레 흘러가게 된다.

첫 샵은 1년도 견디지 못하고 폐업을 했다. 2010년 봄에 오픈해 겨울이 채 되기 전에...

준비되지 않은 자는 자영업에 뛰어들면 안 된다는 것을 느꼈다.

37살에 만났던, 내가 가장 사랑했고, 성향 또한 잘 맞던 그와의 관계가 삐걱이고 있었을 때라, 일과 사랑을 분리하지 못했던 나는 좌절에 빠져 있기도 했다.

냉철하지 못하고 감정에 잘 휘둘리는 내 탓이었다. 헤어짐을 통보받았고 일에 집중할 수 없었고, 술에 의지해야 쓰러져 잘 수 있었다.

딸들처럼 보살폈던 아이들도 눈에 밟혔고, 평생동반자가 될 줄 알았던 사람과 헤어진다는 게 세상에서 버려지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짧았던 첫 샵을 뒤로하고 41살이 되어 급한 대로 스페어 알바를 했다.

알바를 가면 직원으로 일을 해보라고 붙잡았지만, 샵분위가 이상해서 직원을 못 구하는 샵이 대부분이었고, 나 역시 견디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헤어짐을 통보받았던 그와는 내가 매달려 결국 다시 만남을 이어갔지만, 한번 어긋나간 감정들은 이전처럼 쉽게 회복되지는 못했었다. 트러블이 생겨도 이야기 않고 참고 속으로 삭이다가, 결국 술을 마시고 폭발하게 되었고 죽어버린다는 소릴 해버렸었다. 나만 참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일방적인 마음은 상대방이 알지도 못할뿐더러 참아줬다고 고마워하거나 알아주지도 않았다.

아이들도 꽤나 잘 챙기고 잘해주었는데,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는 공치사 같은 마음도 한몫했을 수도 있다.


나이는 들어가고 있고, 사랑한다고 믿었던 사람과의 관계는 끝나가고, 우울감이 극에 다 다르고 있었다.

딸 둘 있는, 가진 거라고 아무것도 없는 남자와의 만남을 반겨준 지인들은 없었다. 보험설계사 친구는 암진단을 받은 이력을 얘기도 안 했다고 혹시나 나중에 병시중만 들다 아이들만 키워야 할지 모른다는 얘길 하며 만남을 만류하기도 했었다. 솔직히 잠깐의 고민은 했었지만, 아무것도 저울질 않는 순수한 사랑을 할 거라고 이야기하며 주변사람에게 더는 얘기 하지 말라고 했었다. 무슨 일이 생겨도 내가 다 감당할 거라고...

엄마도 노파심으로 얘기한다고 남의 자식을 거두는 게 쉬운 일 아니고 혹여라도 애들 사춘기 되어서 반항이라도 하면 속 썩어서 어쩌려고 그러냐며 만류하기도 했었다. 살가운 그 사람을 보고는 네 인생이니 네가 잘 생각해라 하시며 눈감아 주셨었다.

지금 남편에겐 미안하지만, 태어나 만난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다.


알바를 끝내고 집에 와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빈속에 한잔 또 한잔 여러 잔을 마시며 한숨과 눈물을 삼켰다.

나는 왜 내 뜻대로 되는 건 없는 건지, 그동안 힘들었던 가정사와 내가 겪었던 가정폭력, 이혼, 아들과의 헤어짐 모든 감정들이 뒤섞이기 시작했고, 죽고 싶단 생각에 사로 잡혔다.

앞으로 이렇게 살면 뭐가 달라지겠어 그냥 난 루저야, 이제 젊지도 않아 이런 내가 뭘 한다고 뭐가 되겠어...

서랍장에 먹다가 남아 가득 쌓여 있던 관절약을 나도 모르게 손바닥에 한 움큼 털고 있었다.

'더는 살고 싶지 않아'

그때는 엄마도 아들도 그 사람도 친구도 아무도 생각나지 않았다.

죽자 이대로 놔버리자. 손바닥에 있던 약들을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몸은 살고 싶었던 걸까, 죽지 않을 정도의 약을 먹은 걸까, 몸이 차가워지며 덜덜 떨렸고, 왈칵 구토가 쏟아졌고, 정신은 아득해지기 시작했다.

순간 후회가 밀려왔다.


죽기 싫었다.

근처에 사는 동생에게 전화를 했다.

응급실에 갔고 , 의사는 어떤 약을 먹었는지 물었고 다행히 약봉지를 챙겨 온 여동생, 바로 위세척을 시작했다

긴 관이 식도를 지나 위까지 들어갔고 세척액이 계속 들어갔고 들어간 만큼을 쏟아냈다. 뱃가죽이 등짝에 붙 을정도로 웩웩 거리며 입으로 역류해 내는 토사물처럼 눈물도 쏟아져 내렸다.

응급실 안은 아비규환이었다 그나마 정신이 있는 사람들은 살라달라는 소리가 들렸고 각종 기계음으로 부산스러웠다.

응급실안에서 긴 밤을 보내고 나는 다시 태어났다. 정신과 의사들이 진료를 보며 입원을 권유했다.

"우울증이 너무 심해서 치료를 받으셔야 합니다, 1년 정도의 꾸준한 약물치료를 하셔야 해요"

부정할 수 없었던 우울증, 빨리 병원에서 벗어나고 싶었기에 치료권유에도 자의로 병원을 나간다는 확인서에 서명을 하고 병원을 나섰다.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싶었고 마음을 달리 먹었으며 근처에 있는 정신과에 내원해 우울증 약을 처방받아먹기 시작했다. 약이 너무 강했던 건지, 나의 의지나 생각 따위가 사라졌고, 하루 종일 잠만 왔으며 눈동자는 흐리고 초점도 없어 보였다.

나에게 맞지 않는 약 아닌가요 의사에게 물었을 때, 의사는 강한 약도 아니고 괜찮다고만 이야기했었기에 약복용 한 달 만에 약을 끊고 내 의지로 이겨 내보기로 맘을 먹었다.


이후로 내 입에서 죽고 싶다란 말은 한 적이 없었고, 잡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바쁘게 움직였다.

그 사람은 잠시나마 이런 내가 안쓰러웠는지 곁에 머물렀지만, 나한테 질렸다 했고, 핸드폰엔 회사부장으로 저장해 둔 어떤 여자와 만나고 있다는 걸 내게 걸렸으며, 원래 살던 안산으로 이사를 가버렸다.

2012년 3월 두 번째 샵을 오픈하고 한 달이 채 되지 않았을 때 그 사람이 떠나버렸다.

37살에만나 42살이되어 헤어졌다.

식음을 전폐하고 일을 했고, 일주일 만에 5킬로가 빠졌으며, 극심한 스트레스로 어지럼증이 생겼고, 버티고 일을 하다 찾아간 병원에선 이 상태로 어찌 버텼냐고 당장입원하라고 했다.

예약손님이 있어서 오늘은 안 되겠어요 하고 출근을 했고 어찌 버텼는지 그날따라 손님이 몰려 밤 11시까지 일을 했고 다음날 못 일어나 입원을 했다. 3일 밤낮을 약기운에 잠을 잤다.


그 후 난 이겨내기 시작했다.

2011년 자살시도 후 14년의 시간이 흘렀다.

사십 초반의 나는 사십대면 무언가 새로 시작할 수 없는 나이라고 생각했었고, 젊지 않으며, 그때 갖고 있는 게 없으면 루저라고 생각했었다. 이십 대에 힘들었던 나는 빨리 나이 먹길 바랐었다. 막연한 생각이었지만 사십 대쯤 되면 모든 것이 안정권에 들어가 있으리, 꿈꾸던 완벽한 가정과, 자리 잡은 미용실하나쯤 그리고 내 집, 현실은 상상대로 흘러가지 않지만, 사십 대의 시간을 지나 오십 대 중반을 향해 가다 보니 그 시절 또한 젊은 시절이었으며 도전해도 늦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세상에 승승장구하고 즐겁고 행복하기만 사람이 몇이나 있으랴, 그저 묵묵히 하루 또 하루를 견디며 지내다 보면 마음 안의 평안이 올 것이다.

그때 당시 못 살 거 같지만, 또 살아지더이다.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분들도 혼자 끙끙거리지 말고 밖으로 나가세요, 신호를 보내세요. 신호를 조금이라도 캐치하고 받으신 분들은 그분들에게 관심을 꼭 주도록 해보세요.


죽고 싶다는 마음은 살고 싶다는 또 다른 외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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