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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못하는 나의 밤

불면증

by 윤 슬

수업이 채 끝나기도 전이지만 눈엔 이미 졸음이 가득 차 있다. 사력을 다해 천근만 근 한 눈꺼풀에 힘을 주어 부릅뜨고 있는 나는 수업이 끝났다는 종소리와 함께 책상에 엎드려 깊은 단잠에 빠진다. 10분이란 짧은 시간이지만 꿈까지 꾸며 깊은 잠에 빠지던 나.

십 대의 나는 잠이 많던 아이였던 거 같다. 지금은 생각도 나지 않지만 얼마 전 우연히 들춰보게 된 일기장엔 자도 자도 졸린다는 둥 잠보라고 쓰여 있기까지 했고 시험 기간 독서실에서 밤을 새우며 공부하겠다고 커피믹스를 사발로 마셔봐도 잠엔 지고 말았었다.

컨투어 드로잉을 배워봤다 자화상


언제부터 불면증이 생겼을까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이혼을 하고 난 후부터 인 거 같다. 힘들었던 가정사를 겪으며 자란 나는 어린 나이에 집에서 탈출하고 싶었고 결혼을 탈출의 방법으로 택했었다. 부모님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는 막연한 생각을 품고 있었다.

여중 여고를 졸업하였고 뚱뚱하고 못생겼다고 생각해서일까, 이성에겐 관심이 없었고 그냥 여자친구들끼리 깔깔거리고 별일 없이 수다 떠는 걸 좋아하는 평범한 아이였다. 초등학교 이후론 남자아이들과 이야기해 본 적 없는 나는 남자들이 섞여 있는 자리에 있으면 어색한 분위기에 입도 뻥긋 못하고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디자인 학원에 다니면서 절친이 된 친구, 남녀공학을 나온 아이라 주위에 남자친구들이 많았고 장난처럼 군대 간 친구가 부탁했다며 소개팅을 제안했다. 울며 겨자 먹기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나간 자리엔 군인 한 명이 앉아있었다. 친구 동창의 선임이라 했다.

23살 동갑내기, 제대로 된 연애경험이 없던 나는 입에 발린 소리를 끝도 없이 쏟아내고 내가 좋다고 말하는 그의 언변에 싫지 않은 느낌을 받고 빠져들게 된듯하다. 그는 군대 제대를 하고 아무 계획이 없던 남자였고 나는 학원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한 지 2년이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런 그와 혼전임신을 하게 됐다. 뒷일은 생각지 않고 임신 사실을 부모님께 알렸다.

부모님 얼굴에 먹칠하는 일은 안 하고 살 거라고 늘 자신 있게 얘기했던 나의 행동에 배신감을 크게 느낀 엄마는 유산을 종요했지만, 모성애라기보단 경험해보지 못한 무서움에 난 아무 결정도 내리지 못했고 생명을 없앤다는 건 큰 죄악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막상 결혼 승낙을 받고 시댁 방문을 몇 번 하다 보니, 집안 환경은 최악이었고 늦둥이 아들이었던 그의 부모님은 내겐 너무 무서운 존재로 보였다. 덜컥 결혼하는 게 무서웠고 하기 싫었다. 배 속의 아이는 자라고 있었고 그 상황을 끝내기엔 너무 겁쟁이였고, 집을 탈출할 유일한 방법은 이것뿐이라고 혼잣말로 계속 되뇌었다. 첫 만남부터 결혼까지는 7개월이 걸렸다.


없는 살림에 간신히 월세방을 얻어줬다고 생색을 내시던 시부모님은 대신 친정엔 전셋집이라고 거짓으로 전하게 했고 남편은 변변한 직장도 없이 만석부두 일당용접 일을 드문드문 나가며 반찬값이라며 주는 게 고작이었다. 시어머니는 황해도 출신으로 덩치도 크고 어디서도 못 들어본 쩌렁쩌렁한 목소리, 욕도 서슴없이 하시던 분이셨다. 조용한 엄마 밑에서 욕 한 번 듣지 않고 자란 나는 심장이 오그라들 정도로 무서웠다. 화수동 뒷골목 방 2칸짜리 월셋집, 그곳이 내 새로운 보금자리, 행복을 찾아보겠다고 탈출했던 그곳엔 다른 악몽에 몸서리치고 있는 내가 있다.


결혼식 이틀 전 난생처음으로 파출소에 가보았다. 신혼집 청소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동네 형과 싸워 파출소에 신고가 들어와서 내일 경찰서로 이송이 된다고, 가해자가 되어 얼굴은 찢어져있고, 하.... 모레가 바로 결혼식 인대, 다행히 합의가 되었는지 벌금형으로 마무리되었고, 결혼식 당일 23살의 새신랑은 얼굴에 꿰맨 상처를 밴드와 두꺼운 파운데이션으로 커버하고 예식을 치렀다. 그때 이미 폭력성을 알았어야 했다.

처음 음주폭행을 당한 건 만삭 때쯤 술 마시고 들어온 남편과 말다툼 중 자리를 피해 코트를 꺼내려 장롱문을 열었을 때 발로 배를 차여 장롱 안으로 고꾸라졌을 때다. 친정으로 도망치고 싶었지만, 엄마에게 이런 꼴을 보인다는 게 미안하고 차마 알리면 안 될 일이라고 생각하며 겨울밤 동네를 몇 바퀴나 돌고 나서 집으로 다시 들어갔다. 술에 취해 자고 있던 그는 다음날 미안하다고 무릎 꿇고 빌었고, 순진한 나는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라던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생활정보지를 주워온 내 눈에 대기업생산직 모집공고가 보였고 남편에게 입사 지원해 보라고 해서 운 좋게 취업을 하게 되었다. 출산에 맞춰 고정수입이 생기면 셋이서 잘 살 수 있으리라, 아이가 우리를 단단하게 연결해 줄 고리가 되어줄 거라, 한시름 놓았다. 24살에 아들을 낳았다. 육아에 녹초가 되었고, 주·야간 근무를 하는 남편의 눈치를 보며 뒷바라지하며 내가 누군지 잊고 살기 시작했다. 내 처지가 창피하다고 생각되어 친구들과 연락도 하지 않았다.

한번 시작된 폭력은 횟수가 더 잦아졌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아들의 눈물 맺힌 절규의 눈동자 10개월 된 아이도 폭력의 두려움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는 걸 알게 됐던 사건.

언제부턴가 외투 속에 만 원짜리 한 장씩 넣어뒀다. 여차하면 아이를 안고 나올 요량으로 그날은 아이를 꼭 안고 있었다. 설마 아이 안고 있는데 때리지는 않겠지 하고……. 이성을 잃은 술 취한 눈동자 손이 그대로 날아왔다. 아이를 안고 다행히 침대로 쓰러졌고 혼자 씩씩대다 잠든 틈을 타, 아기용품 하나 챙기지 못하고 내복 바람에 코트로만 아이를 꽁꽁 싸며 고 처음 친정집으로 피신을 했다. “혼낼 테니 참아라. 아이가 있는데 어찌할 거야” 친정엄마의 이야기, 시어머니 쪼르륵 전화 와서 “네가 어찌했으면 제가 그랬겠냐 술 취했으면 그냥 피했어야지” 이후 몇 차례 친정으로의 피신은 계속됐다.

4년의 결혼생활을 끝내고 이혼을 했다. 아이가 눈에 밟혀 참고 참았지만, 어느 날 나 또한 엄마에게 듣고 상처받았던 이야기 “너희 때문에 내가 이렇게 참고 살아” 내가 아이를 원망하며 참고 살 수도 있단 생각이 들면서 아이를 원망할 바엔 아이에게 원망 듣는 편이 나을 거다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 성씨 애는 절대 못 준다”라는 시아버지의 말, “나이도 어린데 너도 너 살길 찾아야지 그쪽 씨 못 준다는데 혼자 나와” 엄마의 말에 합의이혼을 하며 양육권은 아이 아빠에게 주고 나는 혼자가 되었다.


집을 탈출하면 행복이 찾아올 줄 알았던 나는 이혼 후 친정으로 다시 돌아갔다. 1년은 아이의 환청에 괴로워하며 많이도 울었다. 내 살길도 찾아야 했고 미용학원에 다니며 아르바이트했으며 자투리 시간엔 술에 의지하며 살았다. 술을 마시지 않는 날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편안하게 잠을 깊이 잔 적이 없다.

생계수단으로 헤어미용을 배웠고, 삶을 열심히 산다고 자부하면서도 외로움에 무언가의 허기가 항상 그림자처럼 붙어있다는 생각을 했다. 짬을 내어 새로운 인간관계의 모임도 나가봤고 나 좋다는 남자도 몇 번 만나봤지만, 사랑한다고 다가왔던 남자에게 사기도 당해보고 목적이 있거나 쓸데없는 에너지소모였고, 이용가치가 없으면 나도 모르게 잊히는 인간사에 외로움이 더 커졌다고 할까, 난 왜 이리 외로움이 많은 사람일까 죽고 싶단 생각을 종종 하게 되었다.

4살 때 헤어진 아들과는 5살 때 마지막으로 얼굴을 봤고 애 아빠는 재혼한 상태였다. 아들과 만나게 해 달라 보낸 문자를 재혼녀가 봤고 연락하지 말란 답장을 받았다. 혹여 아들에게 피해가 갈까 봐 후론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친할머니가 아이를 돌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늦은 밤 종종 대문 앞을 기웃거린 적도 많았다.


싸이월드가 유행 중이었을 때 친구검색으로 아들의 계정을 찾아냈고 방명록에 종종 글을 남겼다. 전화번호를 적어놓고 전화를 달라고, 그러던 중 중학생이 된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누구세요? 하고 묻고 있었지만, 알고 있었을 거다. 내가 엄마라는 걸……. 아빠 모르게 계속 연락하고 만나게 되었다.

아들과 만나기 2년 전쯤 많이 사랑하게 된 사람이 있었다. 딸이 두 명이었던 그 사람 은 나와 취미나 감성이 풍부한 면에서 잘 맞았다. 가족이 될 수 있을 거로 생각하고 5년을 함께했다. 미련하게 내 아들에게 해주지 못한 걸 속죄라도 하듯 그 사람의 딸아이들에게 잘해주고 싶었고 엄마의 자리를 채워주고 싶었다. 결혼과 이혼 출산을 경험해 본 두 사람이라 이해심이 더 많을 거라 생각했지만, 내 상처가 더 크다는 걸 알아달라 이야기했고, 감정전달도 미성숙했고, 힘든 상황이 왔을 때 서로 미루며 불만을 토해내며 싸우다 결국, 헤어졌다. 일방적인 이별 통보를 받았고 곡기와 잠을 끊으며 일을 했었고 극심한 스트레스로 입원까지 했었다.

미용사로 관절을 너무 많이 써서 쉬는 날마다 물리치료를 받았고 약을 받아왔었다. 위가 약해 며칠 먹다 남은 약들이 서랍에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어느 날, 혼자 술을 마시다 서랍 속에 가득 있던 관절염약을 한 움큼 털어 넣었다.

상처의 대물림, 외할머니의 자살을 본 엄마, 자살시도 하려는 엄마를 말렸던 나, 그리고 자살시도를 한 나,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나아지지 않고 항상 패배자가 되는 거 같아서 살 힘을 잃어가던 때 몇 날 며칠을 못 자고 머릿속엔 온갖 잡생각의 고리로 머리가 터질 거 같았었다. 몸이 차가워지면서 떨렸고 속에선 구토가 올라왔다. 약을 어느 정도 게워냈고 갑자기 두려웠다. 이대로 진짜 죽을까 봐, 죽고 싶었던 게 아니야, 난 잘살고 싶었던 거구나…….

근처에 살던 여동생에게 전화했고, 응급실에 누워있던 나는 위세척으로 웩웩거리며 눈물을 쏟아냈다. 우울증이 너무 심하다고 입원치료를 권유받았지만 입원하지 않았다. 목구멍이 포도청이었다. 후에 죽고 싶단 소리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스스로 병원을 찾아가 우울증 약 처방을 받아먹었지만, 한 달가량 먹다 약을 끊었다. 뇌를 마비시키는 것인지 아무 생각도 안 나고 잠만 왔다, 눈동자를 보니 초점이 하나 없는 썩은 생선 눈알 같았다. 6일을 12시간 일했고 쉬는 날이면 여기저기 여행을 갔다. 혼자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걸 해봤다. 일이 하기 싫을 땐 한두 달 휴식기를 가졌다.

미용 지인이었던 4살 아래 남자와 재혼해 9년째 사는 중이다

남편 또한 재혼이지만 아이는 없었고, 문뜩 측은지심이 밀려와 46세 나이로 시험관 임신 시도를 했다 시험관시술을 받으려면 혼인신고가 되어있어야 했고 혼인신고 후 2주가 지났을 무렵 치매로 노인유치원을 다니시던 시어머니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며느리가 되자마자 장례식을 치렀으며, 다행히 며느리가 잘 못 들어와 초상을 치른다는 말은 듣지 않았다, 5번의 시술, 한 번의 임신과 유산을 겪으며, 48세 나이로 임신의 노력을 끝냈다.

닿을 수 없는 평행선 같은, 뇌 구조가 전혀 다르다는 남과 여 지금 남편과도 초창기 3년은 많이 싸웠고 위기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릴 때보다 깊어진 생각 나름 넓어진 아량으로 남편은 중2병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이고 있다.

여전히 잠 못 이루는 날이 많았고 종종 수면제를 먹고 잠들기도 했고 “몸을 힘들게 해 봐라. 커피를 끊어봐라” 주위의 말을 따라 봐도 소용이 없었다. 잠을 오게 하는 버튼이 고장 났다고 생각된다. 오십 세 살의 난 지금도 불면증이 있다. 선잠을 자며 꿈을 많이 꾸고 종종 수면제를 먹기도 한다. 일을 놓았고 배워보고 싶던 것들을 취미로, 그림을 그리고 운동으로 줌바를 하고, 브런치도 즐기며 수다를 떨기도 한다. 원래도 많지 않았던 욕심을 내려놓고 있다.

30살이 된 아들과는 친구처럼 지내고 있으며, 지금의 삶은 별문제 없이 굴러가고 있다. 불면증도 한 습관이 된 것처럼 며칠 못 자면 또 며칠은 잠을 준다.

모든 두려움 뒤에는 소망이 있다.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나의 소망들이 많은 두려움을 만들어냈고 두려움의 크기가 커져 불면증을 달고 살았나 보다

덤덤히 덜고 덜어내면 단꿈에 빠져 개운한 아침을 맞는 날이 오리라고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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