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상처는 성인이 되어서도 영향을 끼친다
아빠가 배를 타러 나가면 온전히 엄마 혼자서 4남매를 보살펴야 했다.
엄마는 전라도 청산도란 섬 출신이다. 엄마는 어린 나이에 외할머니가 자살하는 걸 목격하게 됐다. 그 후 외할아버지의 학대와 무관심에, 17살 나이로 섬에서 서울로 상경했다고 한다. 엄마는 서울에 올라와 온갖 공장을 전전했다. 그리고 그녀의 아리따운 십 대와 이십 대 시절을 공장에서 보냈다. 내향적이고 소심한 엄마는 사랑받아본 적이 없어 표현을, 서툴러했고 외로움을 한처럼 품고 있다는 걸 나도 성인이 되고 한참이나 지나서 알게 되었다.
아빠는 경상도 감포 출신으로 팔 남매의 막내로 16살에 시골을 뛰쳐나와 안 해본 일이 없다고 하셨다 진취적인 성격이지만 고집이 세셔서 한번 우기기 시작하면 누가 뭐래도 당신이 옳다는 소리를 들어야 직성이 풀리시는 분이시다. 중매로 만나 그 당시론 좀 늦은 결혼을 하여 슬하에 4남매를 두었다.
한 살 위 언니, 나, 세 살 아래 여동생, 다섯 살 아래 남동생. 어린 시절 어렴풋이 떠오르기론 내 나이 예닐곱 살이려나. 둘째로 태어난 나는 중간에 끼어서 언니와 싸우면 언니에게 대든다고 혼나고, 동생들과 싸우면 동생들을 못 돌본다고 혼나기 일쑤였다. 새 옷은커녕 물려 입은 옷이 많았고, 중간에 끼어서 눈치 보느라 키도 제일 작다면서 투덜거리곤 했다.
첫딸이었던 언니는 엄마·아빠의 관심을 좀 더 받고 큰 거 같다. 팔십삼 세 되신 아빠가 최근에 이야기하셨다 “언니는 아주 예뻐했었다” 아마 언니 입장에선 내가 태어나면서 오롯이 받던 관심이 분배된다는 걸 느끼고 날 그리도 떼어내고 다니고 싶었으리란 생각이 든다. 언니 꽁무니를 놓칠까 봐 졸졸 따라다녔지만 결국 언닌 친구와 사라져 버렸고, 그래서일까 내가 생각하는 언니는 동생들을 챙긴다기보다 본인이 우선인 사람이라고 생각 되었다.
사 남매 중 돌사진이 있는 언니와 남동생이 부러웠던 적이 있었다. 셋째였던 여동생도 나와 비슷한 감정들을 느꼈을까?
아들 아들 하던 집에 막내로 아들이 태어났으니 동생은 더 생기지 않았다. 남동생이 태어난 집, 엄마가 결혼 후 이백만 원가량 주고 샀다는 첫 집 앵두나무가 유난히 탐스러웠던 그 집이 내 인생 가장 예뻤던 집으로 기억된다.
아빠의 부재 한두 달에 한 번 집에 오셔서 며칠 만에 사라지던 존재, 어릴 적 나는 아빠 오는 날을 기다렸으리라, 대문을 열고 반갑다고 웃으며 두 팔 벌려 나를 안아주고 엄마를 안아주는 그런 정감 있고 따듯한 아빠를….
사랑표현이 서툴렀던 엄마는 안아주고 사랑한다 부비적 해주진 못했어도, 엄마의 표현방식대로 우리를 잘 돌봐주셨다. 카스텔라 도넛 핫도그 김밥 튀김, 집에서 만들어 먹기 어려웠던 음식들도 뚝딱 만들어주셨다. 그게 엄마만의 사랑의 표현이란 걸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살던 집에서 이사했다. 이즘 아빠는 배 타는 일을 그만두셨고 주택을 지어 매매하는 일을 시작하며 동업으로 배를 사서 선주가 되었다. 한 번쯤 사업이 안 된 적도 있었지만, 사업이 번창하기 시작하면서, 나의 사춘기도 시작되며 뭔지는 모르겠지만 집안 분위기가 석연찮다는 걸 처음으로 느꼈던 시기이기도 했다.
사업이 번창하던 아빠의 허세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1988년 우리 가족은 고급맨션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그때 엄마는 사십 대 중반, 언니 고2, 나 고1, 여동생 중1, 남동생 초6이었다.
집안은 번지르르 좋은 가전 가구가 채워졌지만, 그때부터 아빠를 제외한 우리 가족들의 상처가 슬픔이, 시작된 집이 됐다. 집이 커지고 방이 4칸이나 돼서인지 부모님 방, 언니, 남동생은 방이 따로 있지만, 여전히 여동생과 나는 한방을 쓰게 되었다. 우린 우리도 방을 따로 쓰고 싶다고 했지만, 방 하나가 비기 전까진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어느 날부터 인가 집에 드문드문 들어오기 시작한 아빠.
말없이 술을 드시기 시작한 엄마, 가끔은 인사불성이 되어 누워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곡기를 끊기도, 살림을 놓기도 했다. 그럴 때면 죽을 끓여 드렸고, 동생들을 챙겼다.
아빠가 집에 오는 날은 여지없이 싸움이 시작됐다.
육탄전에 죽어버리겠다고 언제 구했는지 모를 약병을 들고 어느 날은 부엌칼을 들고 나오기도 했다. 엄마를 붙잡고 말리며 나는 처음 느껴보는 두려움을 느꼈었다.
엄마·아빠 사이에 문제가 생겼다는 건 싸우던 내용 중 “그년이랑” 이 소릴 듣고 확실해졌다.
아빠의 바람, 이미 다른 살림을 차려 살며 집에는 가끔 한 번씩 들렸을 뿐이라는 걸 알게 됐고, 그나마 그리 좋아하지 않던 아빠에 대한 분노와 증오와 미움이 시작됐다.
부모님의 싸움이 있는 날이면 동생들은 겁에 질려 방 안에 들어가 나오질 않았다. 언니는 집에 없던 적이 많아지고 있어도 신경을 안 쓰는 거 같아서, 방관자처럼 보여 언니도 미워하기 시작했다. 집안 문제를 친구들에게 얘기하기도 창피했고, 어린 동생들과 속내를 얘기하지도 못했다. 아닌 척 괜찮은 척 학교에 다니고 내 할 일을 했지만, 집에 가기가 싫었다.
어느 날 엄마가 우리를 원망하는 소릴 들었다. 아빠와의 싸움 끝에 나가버린 아빠를 뒤로하고, “너희 때문에 내가 이러고 살아”
당시엔 우리가 왜 저런 말을 들어야 하는지 이혼을 결정 못 하는 엄마가 답답했다.
엄마가 뱉었던 저 말은 머릿속에 크게 각인이 되어 차후에 내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고3이 된 언니는 성적 때문인지 집을 탈출하고 싶어선지 지방대로 원서를 냈고, 방학 때만 집에 들러 집안의 문제와는 담을 쌓고 사는 듯해서 너무나 부러웠고 미웠다. 언니가 지방대를 가는 바람에 여동생과 나는 방을 따로 쓸 수 있어 좋기도 하였지만, 나와 동생들은 집에 오자마자 각자 방으로 들어가 나오려 하지 않았다.
여전히 집은 냉랭했고 집에 없을 때 엄마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두려웠지만, 나도 빨리 집을 탈출하고 싶다는 생각이 항상 머리를 맴돌았다.
아빠의 바람은 끝나질 않았고 고3이 된 나는 지방대의 꿈을 놓쳤다. 그래도 언니라고, 언니 다니는 학교에 원서를 내려했지만, 절대적으로 오지 말라던 언니, 성적도 안 되는 내게 근처 대학원서를 내라고 체면치레하려던 아빠, 지질이도 운 없게 아빠의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집을 피해 여관에 육촌친척 집으로 뿔뿔이 흩어져 지내던 와중에, 난 대학이고 뭐고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20살이 되었고 재수를 종용하던 아빠에게 보란 듯 반항하며 디자인 학원에 보내달라고 우겨 디자인 학원에 다니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 미술을 배우게 해달라고 처음으로 부탁했다. 돈이 많이 든다고 안 된다고 했던 아빠는 당신 사치 부리고 체면치레하는 데는 돈을 쓰면서 자식의 간절한 부탁을 외면했다. 그런 아빠로 인해 한 번 틀어지고 상처받은 마음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엄마의 상처가 제일 컸겠지만, 그때의 나는 내가 제일 힘들다고 생각했었다.
스무 살이 된 나는 술도 마셔보고 담배도 입에 대봤다. 아르바이트도 열심히 했었다.
“네까진 게 힘든 일을 어찌할 건데, 하루도 안 돼서 못한다고 할걸” 아빠의 핀잔을 들으면 보란 듯이 해내었다. 몸이 힘든 건 견딜 수 있지만, 내 맘은 너무나 나약해져서 혼자 툭하면 울었다. 나는 감수성이 많고 눈물이 많다.
아빠가 가정을 잘 지켰다면 나는 상처받지 않았을까, 소심해지지 않았을까, 애정결핍에 허덕이지 않았을까, 내 인생이 꼬이지 않았을까, 지금이랑은 다른 삶을 살고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었다.
십 대에서 이십 대 초반을 상처받으며 보낸 나는 집에서 벗어나고 싶단 생각에, 23살에 무턱대고 결혼을 했고 음주폭행을 견디다 27살에 합의이혼을 했고, 양육권을 넘기고 친정으로 돌아왔으며, 아이를 두고 온 자책감과 자괴감에 많은 시련을 겪으며 보냈다.
잘 나가던 아빠의 사업은 부도로 끝났고, 딴살림도 끝이 났다. 으리으리하던 집엔 빨간딱지가 붙여졌고, 시장골목 월세방으로 이사를 했으며, 엄마는 파출부, 식당 설거지를 전전하며 생계를 책임졌다. 아빠는 빈털터리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으며, 후에도 간간이 바람을 피웠던 거 같다.
아빠에게 주홍글씨를 새겨 놓은 엄마는 여전히 미움을 가슴속에 응어리로 키우면서도 끝내 아빠를 챙겼으며, 자식들에게 전화로 흉을 보며 하소연하시면서 당신은 당신의 책임을 다했고 가정을 끝까지 지켰다고 자랑스러워서 하시는 거 같다.
결혼은 현실이었다. 어찌어찌 잘될 거로 생각하고 결혼을 도피처로 생각했던 건, 23살 나의 오류였다. 행복한 가정도 많겠지만, 알고 보니 사연 없는 집도 없었다. 모두 꽁꽁 싸매고 있었을 뿐….
세월이 변했어도 아직 부모님의 바람이나 우환들로 들썩거리는 가정의 자녀들이 있을 것이다. 부모님은 부모님이고 나를 더 아끼고 사랑하며 단단해졌으면 좋겠다.
인생엔 많은 문들이 기다리고 있다. 어떤 문이 열릴지는 모르는 일이고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책임지는 건 나, 이다. 나쁜 문을 먼저 열었다면, 좋은 문이 열리는 날도 있을 것이다.
그때의 나에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넌 너무 착했고 마음이 여렸고 너보다 남들 생각에 눈치 많이 보고 살았지만, 힘든 상황에도 잘 견뎌 주었다고….
기억은 사라지지 않겠지만, 상처는 아물 수 있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언제나 나였다. 엑스트라가 아닌 주연으로 남은 생을 당당하게 살아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