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 가 더 익숙한 72년생
초등학교를 6년이나 다녔지만 내겐 특별한 기억은 없다. 다른 사람들의 기억도 이 정도 일까 궁금하기도 하다.
1학년때 책상에 금을 긋고 못 넘어오게 하고 공책을 찢던 못된 짝꿍, 졸업앨범 이 아이의 얼굴엔 펜으로 시커멓게 낚서가 되어 있다 , 나눗셈을 못한다고 나머지 공부를 시키며 열 살 밖에 안된 아이의 싸대기를 때리던 뽀글 파마에 곰보얼굴의 선생님, 나를 수포자(수학포기자)의 길로 발 딛게 했던 3학년 때 담임 선생님, 그 후로 수학공포증이 생겨 수업시간마다 배가 아플 정도였다.
당구채를 잘라 지휘봉처럼 휘저으며 들고 다니던 4학년 때 남자대머리 선생님 커다란 당구채가 엄청 위협적으로 보였다. 그때는 선생님들이 애들을 왜 그리 때렸었는지....
무서웠던 선생님을 만난, 3학년, 4학년만 생각나는 거 보면 두려웠거나 안 좋은 기억들이 트라우마로 남는 게 맞나 보다.
한 반에 70명에 육박하는 학생수, 반은 16반 까지 있었기에 교실이 모자랐고,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눠 등교를 했었다. 나무마루 복도는 집에서 걸레를 만들어 오라고 하여 왁스칠을 하도록 했다.
겨울철 난로 장작, 석탄 가져오기 난로 위에 도시락 올려두기, 우유급식받아오기, 운동회 연습, 채변봉투, 재래식 화장실에서 풍겨오는 암모니아 냄새는 웬만해선 화장실을 안 가고 참기 일수였고, 그나마 줄을 서다 쉬는 시간이 끝나버리는 경우도 많았었다.
눈을 반짝이게 했던, 제일 좋아하던 문방구 구경, 그중에 나는 판박이 스티커를 젤로 좋아했다. 붙이고자 하는 물건에 스티커를 오려 붙이고 손톱으로 북북 하고 긁어주고 투명 스티커를 떼면 완성, 아차 잘못 긁으면 그림이 깨어진다. 사고 싶었지만 돈이 없었기에 엄마 지갑에 손댄 적이 있었고 걸리지 않아 두세 번 도둑질을 하다, 엄마한테 엄청 맞았었다.
특별히 친했던 아이도 별기억이 없다. 인간관계에 대한 특별한 기억은 내가 잊은 건지 기억하지 못하는 건지는 모르겠다.
헌대, 학교 가기 전에 같이 놀던 동내 친구들 이름은 지금도 생각이 난다.
셋방 살던 집 집주인의 딸 중 한 명이 나와 동갑이었고 , 우연히 초. 중. 고 같은 학교를 나와 지금도 연락하는 친구, 눈뜨자마자 "자영아 노올자, 자영아 놀자" 돌림노래처럼 대문 앞에서 소리치면 잠시 후 대문이 열렸고 자영이와 놀던 기억은 선명하다
학교 가기 전의 기억들이 더 선명한 건 왜일까.
팔십 년대를 다룬 드라마 내용처럼, 한동내서 태어나 자라고 오래도록 많은 걸 공유하고 성인이 되어서도 연락하며 지내는 친구는 그리 쉽게 만들어 지진 않는 거 같다.
십여 년 전에 생긴 초등학교 밴드모임에 쑥스럽지만, 나가 보았고 몇 명의 아이들은 이름과 얼굴이 떠오르긴 했으나, 그 애들과의 특별한 기억이나 추억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같은 시대, 같은 동내, 같은 학교, 같은 나이라는 공통점으로 급히 친해지긴 했지만 말이다.
여덟 살부터 열세 살까지 육 년이란 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닌데 학교에서는 별기억이 없다. 굳이 말하자면 사람에 대한 친구에 대한 기억이라 해야 할 거 같다.
그때는 하교 후 학원 투어를 하던 시절이 아니었어서 하교 후 웬만한 아이들은 집으로 바로 갔고, 내가 유일하게 다니던 주산학원은 유난히 산수를 못해서 인지 엄마가 특별히 보내준 거 같다.
그나마 주판에도 흥미를 못 느낀 나는 몇 날며칠 땡땡이를 치다, 학원비 내는 날 엄마한테 받아 나온 학원비를 어쩌지 못해 학원에 간 날 선생님의 가정통화로 발각 나서 엄마께 호되게 혼나고 몇 년을 더 다니다 그만뒀었다.
학교보다는 집이 더 좋았던 공간이었던 것도 같고, 그럭저럭 무탈하게 지내고 있었던 거라 생각한다. 아니, 꼬마였던 내겐 큰 욕심이 없었기에 행복했던 시간이라 기억이 없는 거 같기도 하다.
요즘 나의 소소한 소망은 오늘 하루를 무탈하게 보내길, 아무 일 없이 지나가길 기원하며 지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