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위한 누군가의 ‘추앙’을 기억하라.

느린 공력과 애틋한 마음이 깃든 사물 ‘밥멍덕’

by 홍지수


<자수, 꽃이 피다> 전, 밥멍덕, 19-20세기, 갼+쪽모이 기법, ⓒ서울공예박물관



<자수, 꽃이 피다> 전 동선이 끝날 때 즈음, 좌측 유리 전시장 하부에 ‘밥멍덕’이 놓여 있다. 밥멍덕은 아궁이에 가마솥을 앉혀 밥 짓던 시절에 특히 요긴했던 물건이다. 일종의 보온용 밥그릇 보자기다.

여인이 삼시세끼 식사 때마다 부뚜막 앞에 쪼그려 앉아 장작과 마른 솔잎 양을 연기 날리는 아궁이에 집어 넣고 불 조절하여 새밥을 짓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각자 일로 바쁜 식구들이 식사 때에 모두 일제히 시간 맞춰 들어와 밥상 둘러앉아 밥을 먹고 치우는 일도 매한가지다. 종종 갑자기 내 집에 찾아온 손님이나 이웃, 일하러 온 이에게 밥 한 술 뜨고 가길 권해야 할 때도 있다. 아무리 없는 살림이어도 이럴 땐 변변한 찬은 제껴 두고 따뜻한 밥이라도 넉넉히 내어야 안주인의 면이 선다.


아궁이 가마솥 밥 짓기가 짧은 시간 안에 후딱 밥을 쉽게 지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자칫 밥상을 차리는 도중 혹은 식사하다가 뒤늦게서야 밥이 모자라면 큰 일이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들은 늘 밥 먹을 식구보다 조금 여분의 밥을 지어 밥그릇에 덜어놓고 구들방 가장 온도 높은 곳에 보관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 내어 놓곤 하였다. 추운 계절 안주인이 볼일 보러 나가면서 미리 밥을 해두어야 할 때도 밥망덕을 두엄처럼 덮어 따듯한 아랫목에 두면 온기가 제법 오래갔다. 여인의 살핌과 지혜 덕분에 식구들이 온기 어린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여인의 고된 밥 짓는기는 오직 이 밥이 자식의 입에 들어가 살이되고 피가 되길 바래서다.



지금은 전기밥솥이 1-2인분 밥을 순식간에 짓는 시대다. 가전회사들은 저마다 자기 제품이 옛 가마솥 밥맛을 십분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고 광고한다. 전자레인지로 냉장고 속 식은 밥을 꺼내 데우는 데도 1-2분이면 족하다. 편의점만 가도 취향과 용량 다른 공기밥을 팔고 고르는 간편한 시대가 아닌가! 그러나 그런 밥을 먹은 몸은 배는 부를지라도 정신의 허기는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아무리 기술과 유통이 발달하여도 어머니가 색시처럼 불 앞에 앉아 아궁이 불에 한껏 붉어진 얼굴로 땀 흘리는 솥을 연신 닦아 어렵게 지어낸 밥맛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 밥은 입과 목구멍만으로 먹는 것이 아니다. 정신이 허한 이일 수록 연어의 회귀 본능처럼 어머니의 손맛과 따뜻한 품을 그리워하는 법이다.


김순희 作, 코끼리 밥통, 2011, oil on canvas



아무리 정성드려 갓 지어낸 밥이 제 아무리 뜨거워도 시간을, 물리적 법칙을 거역할 수는 없다. 어머니는 최대한 밥의 온기가 사라지지 않게 방에서 가장 따뜻한 구들 자리를 손을 짚어 찾는다. 그 자리에 밥공기를 놓고 밥공덕을 덮은 후 솜 누비이불까지 덮는다. 몸서리나게 논밭에서 일하고 와서도 남편과 자식들이 이 밥을 달게 먹을 것을 알기에 아궁이에 불을 때고 무쇠 솥뚜껑을 부지런히 닦고 밥을 짓는다. 그 마음도 부족한가 싶어 밥그릇에 누비옷을 입힌다.

밥공덕은 그런 평범한 여인들의 궁리와 필요가 만들어낸 핸드메이드 물건이다. 패브릭(견)과 패브릭(견) 사이 솜을 덧대고 누빈다. 솜 누빈 밥공덕은 진공까지는 아니더라도 제법 효능이 좋다. 패브릭과 밥그릇 사이 공간은 외부 온도를 차단하여 보온 도시락 같은 역할을 한다. 적어도 따뜻한 밥을 2~3시간 동안은 김이 폴폴 나는 상태로 유지시켜 준다.


'밥멍덕'은 그저 밥의 온도를 지키려 만든 일상 사물이 아니다. 그것은 만든 이는 밥 때에 늦는 식구 혹은 우리 집에 찾아올 누군가가 부디 찬밥 대신 따뜻한 밥 한 술만이라도 뜨길 바라는 한 여인의 마음이다. 자신보다 식구들을 보듬는 마음, 누군가를 위한 절실한 추앙이 한낮 바쁜 일들에 지칠 대로 지친 한 여인의 몸을 스스로 채근하고, 깊은 밤을 밀어내고, 자투리 천을 잇고 이어 한 올 한 올 바느질 땀을 진격하게 했을 것이다.






<자수, 꽃이 피다> 전의 ‘밥멍덕’에는 흔한 수복이나 희구의 문양 조차도 없다. 색색의 좁고 긴 헝겊조각을 삼각형으로 자르고 연결하여 동그란 돔(Dome) 형태를 만들었을 뿐이다. 제주 본태박물관을 비롯해 국내 여러 박물관의 규방공예 컬렉션에서 밥망덕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유독 문양으로 멋을 부리기보다 가지고 있는 최대한 천을 아끼기 위해 삼각형으로 잇고 솜을 두툼히 넣어 단단히 손으로 누빈 이 밥멍덕에 눈길이 간다. 이것은 '壽福 문양이 없어도 바느질 한 땀이 인간의 안녕을 비는 몸의 기도다. 어찌 그 마음으로 보듬어 내준 밥을 먹은 이가 배 뜨뜻하지 않고 든든하지 않으랴. 그 밥을 먹은 자는 결코 밖에 나가 세상 일과 사람이 주는 치임을 겪어도 절대 비굴하거나 꺾이지 않으리.

‘밥멍덕’. 사람의 온기와 재기를 품은 사물. 이것이야말로 공예. 그것을 만든 기능(手)의 제 뜻이자 추동력이 아닐런지. 홍지수_미술평론/ 전시기획자/ 미술학 박사


+ '소소담화'는 미술비평가이자 전시기획자인 저자가 공예 현장을 다니며 보고 듣고 만나고 느낀 바를 독자들과 나눕니다.




2021년 7월, 서울 종로 안국동 옛, 풍문여고 자리에 서울공예박물관이 개관했다. 한국 최초의 공립 공예전문 박물관이다. 전시 3동 2층 전시실에는 <자수, 꽃이 피다> 전이 상시 열리고 있다. 이 전시는 한국 자수 박물관장이던 허동화․박영숙 컬렉션에서 선정한 자수 병풍을 위시로 일상생활에서 두루 사용한 물품들의 구석구석 수놓은 자수와 규방공예 작품들을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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