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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YODA Sep 26. 2024

세 번째 손님 4 - 아이가 아이를 낳았다


“ 시간은 내일. 토요일 오후 2시” 


남자는 그 이후에 한번 더 복. 덕. 방을 찾았다. 다른 것보다 주인장이 예상했던 대로 다른 비슷한 문제가 있었다고 했다. 다만 이번에는 회사에서 일이 터졌다. 자신에게 불량한 태도를 보인 협력업체 직원과 사소한 다툼이 있었는데 이를 잘 타이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듣다 보니 타일렀다기보다는 실수를 코투리 잡아 거의 일방적으로 화내고 그에 대해 사과를 요구하는 이야기로 들렸다. 


그런 그의 이야기를 듣고 돌려보낸 후 주인장은 결심했는지 손님이 돌아가자 상혁에게 계획을 이야기했다.  


“ 5층으로 갈 거야” 

“ 5층에 가면 뭐가 있는데요” 


“ 모든 것의 시작” 

“ 모든 것의 … 시작?”


상혁은 이번엔 5층에 뭐가 있을지 혹시 감당하기 어려운 건 아니겠지 하는 생각을 하며 이유가 하는 말들을 무의식 중에 따라 하고 있었다.


“ 양말..”

“ 양말.. 양말..”

“ 양말 구멍 났다.” 

“.. 양말.. 에..???” 


말하면 바로 같은 말을 따라 하자 이유는 재미있다는 듯 이번에도 따라 할지 궁금해 무슨 말을 해볼까 하는 심산이었나 보다. 계획이 그대로 먹히자 웃겼는지 어쩐 일로 환하게 웃는 게 영락없는 어린 여자애 같았다. 게다가 정말 양말은 구멍 나 있었다. 언제 구멍 난 거지 창피하게. 뭐가 그렇게 웃기는지 한동안 웃던 이유는 짐짓 다시 진지해진 얼굴로 상혁에게 물었다. 


“ 5층은 만약 게임이라고 치면 이번 생에서 가장 중요한 최초의 보스라고 할 수 있어. 보조만 해도 되겠지만 사람의 정체성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실체를 알고 싶다면 같이 가도 돼. 물론 손님의 5층이 허락해야겠지만”  

“ … 모든 것의 시작이며 최초의 보스라..” 


진짜 본판을 보러 갈 결심이 서면 따라오고 그렇지 않다면 이쯤 해서 보조만 해도 괜찮다는 거였다. 어쩌지? 

상혁은 일단 이 무의식이라는 세계가 진짜의 현실세계는 아니라는 걸 이제 겨우 체감하게 된 정도였다. 하지만 지난번 남자 손님의 검은 점을 건드릴 때 베테랑인 주인장도 직접 만지지 못하게 하는 데다 장갑을 덧씌워서 만지는 것이 아무래도 무언가 완벽하게 안전하다고 안심할 수는 없는 것 같았다. 게다가 장갑엔 그 검댕이 같은 게 묻어서 퍼져가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나저나 이 남자 손님 마음속에 그때 던져 주고 온 반짝이는 화재방지용 장갑이 살고 있게 된 건 아니겠지? 잠시 다른 곳으로 의식이 갔던 상혁은 애써 주인장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 만약 실제로 물리면 어떻게 돼요?” 

“ 적어도 넌 물리지 않게 조치할 거야”

“ 그래도 물리면요. 제일 궁금한 건 무의식이라는 서재방의 세계가 거기에 들어간 실제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를 물어보는 거예요. 게다가 이렇게 위험한 일을 사장님이 계속하는 이유도 잘 이해가 안 돼요. 저는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안 지도 얼마 안 됐다구요” 


“ 몸에 영향을 남기는 경우는 없어. 그때 네가 화상을 입을 만큼의 뜨거움을 맛봤지만 멀쩡했던 것처럼 말이야. 다만 이 손님처럼 지독한 트라우마의 경우 직접 만지게 되면 그걸 만진 타인에게도 비슷한 파동의 트라우마가 전이되거나 비슷한 상처를 다시 깨우는 계기가 될 수 있어.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마구 상처를 깨우면 힘들어져. 미칠 수도 있지. 그게 우려되는 경우에는 직접 만지는 건 금지하는 거야. 게다가 내가 이 일을 계속하는 건 내 개인적인 이유라고.” 


“ 이유.. 이유라..”


상혁은 멍하니 자신의 구멍 난 오른쪽 양말을 보면서 생각에 잠겨있었다. 


“ 그 괴물은 어떻게 할 건데요? 이번엔 뭐 고기라도 가져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 그건 다 방법이 있지. 약속시간을 토요일 오후 2시로 잡았으니까.”

“ 시간이랑 괴물이랑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는데요.” 

“ 그건 직접 보면 알게 될 거야” 


상혁은 따라나서기로 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 질문할 것이 많았다. 도대체 6층의 짐승을 어떻게 피해서 5층으로 간다는 건지.. 


다시금 물어도 이유는 실습을 하면서 설명해 주겠다는 말로 입을 닫았다. 그 옛날 도재방식도 아니고 이건 뭐 그냥 맨날 실습이라는 생각이었다. 



“ 이제 들어간다”


토요일 오후 2시 05분. 상혁과 이유는 다시금 그 반짝이 방화복을 입고는 서재방 7층에 서 있었다. 이번에도 내려가면 다시 그 검은 짐승을 만나게 될 텐데 주인장은 뭐 하나 떨지도 않고 있었다. 상혁은 자신만 무서운가 싶은 마음으로 겨우 우겨서 가져온 이단 우산을 들고는 주인장 뒤를 따라 내려갔다. 


“ 크르르”


계단을 중간쯤 내려갈 때까지도 경계를 늦출 수 없던 상혁은 계단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맥이 풀리는 것 같았다. 흡사 사자들이 그렇듯 그 커다란 검은 짐승도 넓적하고 평평한 바위 위에서 조용하게 잠들려고 하던 참이었다. 상혁과 분명 살짝 눈이 마주쳤는데도 번뜩이던 눈은 두터운 눈꺼풀을 껌벅이더니 그대로 코소리까지 내며 잠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마취총에라도 맞은 건가? 참을 수 없는 무언가에 의해 잠에 빠져드는 것 같아 보였다. 주인장이 말하는 게 이런 거였나? 오후 2시? 낮잠 시간인가? 그걸 어떻게 알았지? 마음속 괴물은 그런 건가? 상혁은 갖가지 질문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잠든 괴물을 살금살금 지나 이유와 상혁은 괴물이 앉아 있는 넓은 바위 뒤쪽으로 나있는 지하 통로로 들어섰다. 통로는 아래로 나선형으로 돌아 내려갔고 돌 같은 단단한 물질로 이루어져 있었다. 상혁과 이유가 조심해서 걸어도 공기가 진동하며 퍼져나가는 소리가 났다. 딱히 난간이 없어서 왼쪽 편으로 느껴지는 벽을 난간 삼아 나선방향으로 걷고 걸어가자 드디어 바닥에 닿았다. 


이유는 계단 끝 희미하게 문이 있는 것을 보더니 세 번의 노크를 하고 손을 문에 댄 후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그 계약서의 내용이라는 걸 상혁도 곧 알 수 있었다. 


‘ 나는 이들의 도움을 받아 나를 알게 될 것이다’ 


“ 덜커덩 끼익~”


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묵은 먼지들과 열렸다. 내부는 어두웠지만 포근하고 은은한 푸른빛이 있는 층고가 높은 공간이었다. 중앙엔 거대한 나무가 자라고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나무의 가지들끼리도 얽히고설켜서 어떤 것은 여러 개의 가지들이 합쳐져 자라고 있었다. 어른들이 양팔로 두께를 제어 본다면 아마 족히 4~5명은 있어야 될 듯한 크기의 나무였다. 가지들의 끝에는 흡사 물주머니처럼 되어있는 약간은 반투명한 액체들이 어떤 것은 크게 어떤 것은 작게 맺혀 있었다. 그게 무언 지는 주인장이 아주 커다란 액체주머니 앞에 섰을 때 해준 말을 듣고서야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엔 연민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 두려움과 슬픔이야. 물론 분노도 섞여있고” 


주머니는 푸른색과 회색이 섞인 듯한 색을 띠고 있었다. 잠깐동안은 회색이 좀 더 진해 보이다가 곧 푸른색이 좀 더 진해지듯 물감이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액체 주머니 중에서 이유의 말처럼 두려움과 슬픔 주머니만 너무 커져서 나무의 기둥과 큰 가지까지 휘어져 있었다. 문제는 그 주머니가 바닥에 닿을 듯이 아슬아슬하게 차 있다는 것이었다. 


“ 사람 내면에 이런 나무가 있다니 신기해요. 이거 실제 하는 건가요?” 


“ 이 사람의 성격이자 내면이야. 실재하지. 사람마다 다른 표현방식을 갖고 있지만 그 원리는 비슷해. 이 사람은 나무인 거고.”


“ 그런데 이거 이러다가 가지가 부러지기라도 하는 거 아니에요? 너무 무거워 보이는데.. 나무 전체가 저 거대한 주머니의 무게를 지탱하느라 마치 비뚤어져 서 있는 것 같다고요” 


“ 어렸을 때 학대당했던 아이들의 경우 특정한 감정이 제대로 표현되지도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해서 이렇게 내부에서만 곪듯이 남아 버린 경우가 많아. 응축되고 응축돼서 액체 상태가 아닌 딱딱하게 석화된 상태가 된 경우도 있고. 물론 다행히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제대로 아이의 감정을 읽어주고 원인이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걸 알려준 경우는 건강해져서 회복되곤 해. 

다만 이 손님의 경우 나무 전체의 균형을 해칠 만큼 감정의 불균형이 존재하니까. 나무는 곳 살아있는 자기 자신 몸을 움직이는 시스템이자 관리자인 경우가 많은데 이 사람은 지금 두려움과 슬픔이 폐에 저장되어 있어서 호흡자체를 하기 어려워하는 경우가 있어. 분노의 많은 부분은 간에 저장되니까 간도 좋지 않을 가능성이 높고. 이 감정의 주머니가 흘러서 밖으로 나오려고 할 때 말이야. 그래서 더 뭔가 올라오면 삼키고 그랬을 거야..”  


마지막 말은 주인장이 그저 혼자 말을 하나 싶을 정도로 작게 이야기해 상혁도 잘 알아듣기 어려웠다. 다만 저 커다란 주머니가 곧 터져버리는 건 아닐까 하면서도 아이 때 받은 충격과 그 이후 누적된 상황들에 대한 해석이 전체적인 균형을 무너트릴 수 있다는 것이 그저 놀라웠다. 사람이란 이렇게 섬세하고 경이로운 존재인가. 


“ 그럼 이 주머니를 받치고 있는 가지의 이 부분이 사람 몸으로 치면 폐에 해당하는 거예요?” 


“ 응. 슬픔은 폐에 직접 붙어 있고 위가 같이 압박받고 있어. 다행히 이 사람은 그 옆으로 우회로를 내서 어떻게든 성장했고 생활은 하고 있지만… 일단 오늘은 보스를 만나러 온 거니까. 들어가야 해”


“ 에…? 더 들어간다고요?” 


이유는 나무 주위를 섬세하게 살피더니 토끼 굴처럼 되어있는 조그만 입구를 찾았다. 허리를 반쯤은 접어야 겨우 들어갈 듯한 좁고 얕았다. 과연 저런 곳에 뭐가 있는 걸까. 상혁이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나무가 흔들리나 싶더니 가지들 중 끝에 있던 주머니에서 남색의 방울이 튀며 마침 나무를 올려다보던 상혁의 왼쪽 눈으로 들어가 버렸다.


“ 앗. 차가워. ”


눈에 무언가가 들어간 것 같다고 이야기하려던 상혁은 이유가 먼저 들어가자 서둘러 따라 들어가느라 물방울이야기는 뒷전이 되어 버렸다. 어두운 통로를 50 미터 즈음 허리를 구부리고 걸어 들어가자 허리를 펼 수 있는 꽤 높고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상혁은 마치 고대 고분의 비밀장소에 도달한 것 같았다.


넓게 텅 비어있는 듯한 공간의 중앙에는 사람과 비슷한 크기의 길쭉하고 둥그스름한 무언가가 세워져 있었다. 은은한 아이보리 빛을 발하고 있는 누에고치. 상혁은 언젠가 미라 전시에서 보았던 금칠이 된 파라오의 관이 떠올랐다. 순간 소름이 돋은 그는 이유 뒤로 바싹 붙었다.  


“ 이건 내면의 아이가 겹겹이 쌓여있는 형태야. 여러 시간의 겹이 한 번에 있는 표현 방법.” 

“ 으.. 전 도통 모르겠네요. 파라오의 관처럼 약간 으스스하다고요” 

“ 훗 그렇게도 볼 수 있구나. 일단 가장 최초의 아이를 불러야 하는데..”


이유는 최초의 아이의 층을 찾으려면 그게 필요하다며 6층을 지나올 때 찾아온 검댕이 묻은 장갑을 꺼냈다. 괴물이 잠든 덕분에 근처에 놓여있던 걸 가져올 수 있었는데 장갑은 그 검은 괴물의 이빨 자국 때문인지 반쯤 뜯겨 있었다. 6층에서 그걸 왜 다시 찾는지 궁금했던 상혁은 그제야 이해가 되고 있었다. 


장갑의 검댕 부분을 가까이 가져가자 층층이 쌓여 빛나는 아이보리의 겹 중 안쪽 층의 특정한 몇몇 겹이 반응하느라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중에 가장 크게 부풀어 오른 겹들 중에서도 가장 최초에 있는 안쪽 것을 주인장이 부드럽게 집어 올리자 다른 겹의 층들은 마치 무언가를 전달하듯이 안쪽의 층에 몰려 겹쳐지더니 결국 사라지고 점점 아이의 형상으로 바뀌었다. 대여섯 살 즈음으로 보이는 어린아이였다.


“.. 나를 불렀어?”


이제 갓 잠에서 깨어난 듯한 아이는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뜨고 주변을 잠시 둘러보더니 물었다.  


“ 그래.. 부탁을 받고 왔어." 

".. 부탁?"


아이다운 작은 몸을 하고 있고 또래와 같은 외모였지만 대답하는 말투와 공간을 울리는 음성에 상혁은 아이가 아닌 상위의 다른 어떤 존재와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마치 아이의 모습을 한 산신령? 같은 느낌에 잠시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실은 어른이 된 네게 부탁을 받고 왔어.”

“.. 어른이 된 나?” 


아이는 생각을 집중해 어떤 걸 기억하려는 것 같았다. 어딘가 다른 곳에 의식을 집중하고 있어서인지 얼굴은 멍해 꿈을 꾸는 표정이었다. 그러다가 이내 잘 이해되지 않는지 미간을 찌푸리자 이유가 덧붙여 설명을 이었다.


“ 그래. 그 사람이 네가 너무 아프고 힘들어한다고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해서” 

“ 날.. 도와?” 

“ 응.. 너의 고통과 슬픔이 곧 자신의 것이니까."  

" 내가 고통스러운가? 그리고 슬픈가?" 


아이는 마치 타인의 이야기를 하듯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자신의 느낌을 둔감하게 만들기라도 한 건가? 아니면 영 잘못 찾아온 건 아닌가? 상혁은 이 아이 같지 않은 아이의 말에 한편으로는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반면 이유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더니 잠시 깊게 숨을 쉬고 담담히 말했다. 


"고통과 슬픔을 닫아버렸구나. 지금의 네 몸의 느낌.. 그것을 우리는 슬픔이라 불러 그리고 고통이라고도 하지." 

"..." 


아이는 대답 없이 눈을 감았다. 그러기를 잠시 어디가 아픈지 명치 부분을 주먹으로 움켜쥐며 말했다. 얼굴도 움켜쥔 옷자락만큼이나 일그러진 채였다. 


“.. 내가 있는 지금의 상태를 슬픔이나 고통이라고 부르는 거야? 모두들 이런 마음이 아니었던 거야?" 

" 그래.. 안타깝게도. 모든 사람이 아프고 힘든 상태로 있지는 않아."

"..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없어. 나는 지금 말고 다른 어떤 상태가 존재하는지 잘 몰라.” 


" 맞아. 네가 어른이 된 뒤에도 한참을 그랬다고 했어. 정말 오랫동안 모르고 있었데. 네가 내내 그렇게 힘든 아픔을 견디고 있었다는 걸. 자신은 커가면서 아픔이 사라진 줄 알았거든. 그런데 알고 보니 어린 네가 이런 힘든 감정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줘서 그동안 덤덤하게 지낼 수 있었다고 성장할 수 있었던 거라고 하더구나. 미쳐 날 뛰듯 다른 사람들을 다치게 하는 대신 말이야. 그래서 이제라도 너의 그 고통을 같이 보내주고 싶데.”


“ 아팠어.. 하지만 이것이 나의 생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이후로 난 누구도 믿지 않기로 했으니까. 세상은 원래 그런 곳이야. 엄마라고 할지라도 말이야. 그래서 약해지지 않기로 했어. 어차피 이제 나 스스로 살아가는 거야. 다른 세상을 나는 알지 못해. 그래서 너희도 믿을 수 없어.”


고통이 조금 덜해졌는지 아이는 슬픔에 잠겨 있는 듯 여전히 풀이 죽어 있는 표정이었다. 문득 그 얼굴이 어린 자신과  닮았다는 걸 상혁이 깨닫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 네가 지금 가지고 있는 그 아픔 덕분에 어른이 되는 동안 너는 큰 체구와 강인한 체력을 원하고 갖게 되었어. 그래서 어른이 된 네가 너에게 고맙데.. 아픔의 고통을 여태 네가 꽁꽁 묶어서 잡아준 덕분에 고통을 잊고 노력하고 살 수 있었다고. 이제 자신이 어른이 되었으니까 더 이상 너에게만 미루고 고통을 갖고 있게 하고 싶지 않은 거야.” 


“ 글쎄. 난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는 걸.”


아이는 토라진 듯 시큰둥한 표정과 말투로 대꾸했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노여움이 누그러든 모습이었다.


“ 그래. 누구도 믿지 않고 스스로 강해져서 살아가기로 마음먹었을 거야. 아픈 마음과 슬픔, 언제 매 맞을지 모르는 불안한 감정들을 꽁꽁 묶어두었을 테니까. 살려면 그럴 수밖에 없었지. 실제로 열심히 노력하고 성장했지만 그 누구도 믿지 못하게 된 거야.” 


“ 그래 난 누구도 믿지 않아.” 


“ 이제는 그 누구도 성장한 너를 때리거나 할 수 없단다. 아무도 너를 함부로 대하지 않지만 너의 묶여있는 감정과 누구도 믿지 않겠다는 마음이 지금도 세상 모두가 너를 언제 어떻게 공격해 올지 모르는 사람으로 보이게 한 거야.” 


“ 사람을 신뢰할 수는 없어. 특히 우리 엄마. 항상 화가 나있다면 모를까 기분이 좋을 때는 그랬다가 자기 기분이 나빠지면 나를 때려. 엄마를 이해할 수 없어. 엄마도 그런데 다른 사람을 신뢰하는 건 옳지 않아. 그래서 더 이상은 이렇게 맞지 않을 거야 약해지는 건 옳지 않아”


“.. 맞아. 사람은 누구나 약한 부분이 있어. 네가 약해서 매를 맞았다고 생각하는 걸 알아. 하지만 약하다고 맞아야 하는 게 아니야. 너는 약한 게 당연한 나이였고 그때 보호해 주는 대신 때린 건 네 엄마의 잘못이지. 그리고 방관했던 너의 아빠도 성장한 사람은 아니었어. 네가 약해서가 아니야.” 


“.. 내가 약해서 맞은 게 아니라고?” 

“ 아이들은 누구나 약해. 약한 존재를 때리는 사람이 문제인 거야” 

“ 그런 건 처음 들었어.”


아이는 의아한 표정으로 눈썹을 약간 위로 올리며 말했다.


“ 그럼 네가 좋아하는 토끼 말이야.” 

“ 아 이 귀여운 녀석?” 


토끼를 이야기하자 아이의 손에 어느샌가 아주 작고 귀여운 토끼가 생겨 있었다.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상혁은 마치 말하면 바로바로 구현되는 가상의 세계 같은 느낌까지 들었다. 


“ 요 귀여운 녀석은 힘이 세?” 

“ 아니. 이 녀석은 이제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야. 아기토끼. 내가 보호해 줘야 해” 

“ 그래.. 아기 토끼구나… 연약한” 

“ 응 연약해. 아주 귀엽고 예뻐.. 내 토끼” 

“ 작고 약하니까 맞아서 다쳐도 괜찮겠네?” 

“ 뭐라고?!!” 


아이는 토끼에 대해서 도발하듯 말하는 이유의 말을 듣고는 노기가 어린 듯 화가 나 되물었다. 자신이 아끼는 여린 토끼를 보호하려는 게 역력해 보였다.  


“ 약하다고 함부로 대하면 안 돼. 그건 나쁜 사람이야”

“ 아깐 약해서 맞은 거라고 했었잖아. 약하면 맞아야 하는 거야” 

“ 아니야. 약해서 매를 맞으면 세상에 있는 모든 약하고 예쁜 건 어떻게 살아. 때린 사람이 잘못이야. 때린 사람이 나쁜 거라고. 절대로 안 돼”


노기를 넘어서 울분과 어떤 감정들이 뒤범벅되었는지 아이는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 그래. 약한 게 잘못이 아니야. 누구나 약한 부분이 있어. 그건 잘못이 아니야. 넌 약한 아기토끼와 같아. 약한 게 잘못이 아니라 약한 아이를 때린 사람이 잘못이야.” 


“.. 나는 잘못이 없었어. 나도 약한 아이야. 맞고 싶지 않았어. 무서웠어. 엄마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웠어. 맞고 나면 슬펐어. 힘들고 슬펐어. 엄마도 그러는데 나는 누구를 믿을 수 있지? 누가 나를 때리지 않을 거라고 믿을 수 있는 거냐고” 


어느덧 아이는 소리 내서 울기 시작했다. 처음의 산신령 같던 근엄한 분위기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이젠 아주 꼬꼬마 아이의 울음소리였다. 아이가 울기 시작하자 공간을 감싸고 있던 거대한 나무가 흔들리는 건지 끼기긱 커다란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것 같았다. 무언가 밖의 세계에도 변화가 있는 것 같았다. 상혁은 이 고대 고분 같은 곳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며 내심 주인장을 데리고 달려야 하는 상황은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아이가 울도록 그대로 두었다. 진정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그 아이를 울리기 위해 온 것 같았다. 너무 울어서 밖에서 울리는 엄청난 소리에 이곳도 함께 무너진다라는 확신에 상혁이 도달했을 때 즈음 아이가 훌쩍임을 멈추고 이유에게 안겼다. 


“ 자신이 어떤 잘못을 했는지 모르는 부모도 많단다. 그들도 어린 자식이 생기는 게 어떤 걸 의미하는지 모르고 부모가 되어 버린 거야. 몸만 커 버린 사람들 말이야. 그들은 더 어린아이란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들 나름으로 살아가려고 버둥거리는 아이 말이야. 네 잘못이 아니야. 지금부터의 너는 네 마음을 알 수 있어. 넌 너를 믿을 수 있게 될 거야.”


“ 내가 내 마음을 안다고?” 

“ 그래.. 우리를 이곳에 보낸 사람말이야. 너 자신..” 

“ 네가 너를 잠시 만나게 해 줄게” 


이유는 여분의 주머니에서 접어진 종이를 꺼내더니 아이에게만 들릴 속삭임으로 읽기 시작했다. 아이는 처음엔 의아한 듯 듣더니 나중엔 훨씬 밝은 얼굴이 되었다. 


“ 그게 … 나는 늘 이런 상태였는 걸. 그래서 원래 이런 건 줄 알았어. 이것으로 나를 꽁꽁 묶어두고 있는 줄 몰랐는 걸? 슬프고 두려운 거 말이야.” 


“ … 슬프고 두려운 건 당연한 건데 그 에너지가 통합되지 못해서 남아있는 거야. 이제 그 감정들에게 고마웠다는 말과 함께 인정해 주자. 그래도 돼. 밖은 난리가 나겠지만 묶여있던 에너지를 자유롭게 해 주면 생기는 당연한 과정이니까 괜찮아.” 


듣고 있던 상혁은 또또 어렵게 설명하니까 애가 어려워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순간에 이것보다 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 모든 걸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누군가 내 맘을 알고 있다는 게 기분은 좋은 거구나. ” 

“ 우릴 이곳에 보낸 사람은 늘 널 사랑한대.. 미안하고 고맙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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