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가 아닌 문장으로 전하는 말
칼럼에서 뇌 과학자인 정재승 님은 모드 전환, 새로 고침, 재부팅, 정보 처리, 리셋 등의 용어를 많이 썼다. 단지 칼럼뿐 아니라 어떤 글에서든 단어는 단어로 존재할 때가 아니라 문장 안에 있을 때 그 의미가 정확해지기도 하고 여러 가지로 변하기도 한다.
특히 시어(詩語)를 보면 일상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의미가 아닌 다른 뜻으로 전해지는 것이 많다. 시어뿐 아니라 많이 듣는 노래의 가사에서도 그런 단어들을 볼 수 있다.
가수 김연우의 [해독제]라는 노래의 가사를 보면 [온몸에 퍼져 버린 너에겐 너란 해독제만이 이 고열을 내릴 수 있어(중략) 뜨겁게 뜨겁게 체온을 끌어올려 너를 증발시켜줘]라는 문장이 있다. 노래 가사가 아닌 일상적으로도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인 ‘해독제 ’‘고열’ ‘증발’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다. 화학적, 또는 의학적으로만 사용되는 것이라고 생각되던 단어들이지만 노래 가사에 녹아들면서 그 의미가 새롭게 느껴지고 있다.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거나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은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연말 연초에 새해 달력을 걸면서나 다이어리를 사면서 새해 결심이라는 것을 한다. 이것을 컴퓨터의 리셋으로 표현하는 것은 과학자다운 발상이기도 하다.
글을 쓰면서 단어의 한계를 느낄 때가 많은데 하고 싶은 말에 딱 맞는 단어를 고르기가 쉽지 않다. 이것은 단어가 갖는 사전적 의미 외에 뉘앙스가 문장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기 때문인 것 같다.
잊어버린 것과 잃어버린 것. 사전적 의미와 상관없이 잊어버린 것이 어쩐지 작위적이라면 잃어버린 것은 운명 같은 느낌이다. 기억 속에서 지워진 것은 같은데, 잊어버린 것은 언제든 다시 기억이 나면 찾을 수 있는데 잃어버린 것은 다시는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아쉬움과 그래서 알 수 없는 아련함이 있다.
사람들과도 마찬가지로 잊어버린 사람들은 문득문득 다시 기억나기도 하지만 잃어버린 사람들은 다시는 못 만날 것 같은 아련함이 있다. 하늘을 한참이나 쳐다봐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가슴이 찌릿하게 느껴지는 아련함이 있다.
그냥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단어가 있다. 각기 다른 느낌이겠지만 나는 항상 "위안"이라는 말에 반응한다. 한 번도 만나 본 적은 없지만 사진 한 장으로 위안이 되어 최악의 선택의 기로에서 벗어난 팬과 그 얘기에 감동을 받은 축구선수. 우울증에 빠져 있을 때 한 가수의 노래를 들으며 벗어났다는 고백.
옆에서 말로 전하는 것이 위로가 되지 않는 때가 있다. 아무리 잘했다고 칭찬의 말을 들어도 그 말을 상대방이 진심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을 할수록 더 깊은 자괴감으로 빠져들 때가 있다. 이럴 때는 오히려 잘 모르는 사람이 더 위로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