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미국 대학원 합격

by 작가 다영

결혼식을 올리고 5개월 뒤, 직장에서 퇴근을 준비하는데 몸살 기운이 느껴졌다. 증상은 분명 평범한 몸살인데, 기분이 묘했다. ‘혹시...’

왜인지 이건 단순한 몸살이 아니라 임신일 것 같다는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화장실에서 희미하게 나타난 두 줄을 보고 나는 그 자리에서 한동안 멍하니 서있었다. 혹시 내 눈에만 보이는 두 줄은 아닐까? 얼른 남편을 깨워 임신테스트기를 보여줬다.

당시 우리 나이 만 스물다섯,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아이가 훨씬 일찍 생긴 것이다. 기쁨보다 먼저 찾아온 건 두려움이었다. 내가 엄마라니. 네가 아빠라니. 우리가 부모이라니!!!


큰 이벤트 없이 무난하게 임신기간이 흘러갔고 우리 딸은 그 누구보다도 힘찬 울음소리와 함께 이 세상에 등장했다. 이 세상에 내가 내놓은 작은 생명체를 지키는 일. 그 일 한 가지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려고 어린 초보 엄마는 매일이 긴장의 연속이었다. 겨우 3kg 남짓하는 작은 아이가 나에게 주는 책임감이라는 무게는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웠다. 매일 밤 아기가 울지 않아도 나는 혼자 깨서 아기가 잘 자고 있는지, 숨은 잘 쉬는지 몇 번을 확인했다. 난생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채소를 사서 이유식 레시피를 보며 1그램 단위까지 정확하게 맞춰 아이가 먹을 이유식을 만들었다. 아이가 열이 나기라도 하면 어젯밤 춥게 재운 내 탓인 것만 같아 스스로를 자책했다. 내 샤워는 매일 못 해도 포동포동 살이 오르는 아이의 목욕은 매일 시켜줬다. 주변에 갓난아기를 키우는 친구나 지인이 단 한 명도 없었던 만 스물여섯, 어린 엄마의 최선의 노력이었다. ​그렇게 나는 지금까지의 내가 그랬듯 엄마로서도 완벽한 엄마가 되고 싶었다. 우는 것 밖에 할 줄 모르던 나의 작은 아기가 뒤집고, 기고, 걷고, 말하는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며 힘들지만 정말, 정말 행복했다. 이 세상에서 엄마라는 존재가 가장 위대하고 존엄하다고 느끼게 된 시간이었다.


당시 석사과정 학생이었던 남편은 아이가 태어난 후로 가장으로서 부담을 크게 느꼈던 것 같다. 석사 과정을 마치고 박사학위를 따기 위해 미국에 유학을 갈 계획을 세우고 있던 남편이었다. 임신 전에는 ‘아이가 생긴다면 한국에서 조금 키워서 같이 유학 가자’고 가볍게 이야기를 서로 나누었지만, 그 아이가 이제 정말 눈앞에 있고, 그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 현실이 된 당시 우리에게는 미국 유학의 길에 큰 걸림돌이 생긴 것만 같았다. 우리에게 찾아온 새 생명을 책임져야 하는 부모가 되고 보니, 어쩌면 조금 더 안정적인 선택을 해야 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미국 박사 유학, 단 한 가지였던 선택지에 이제는 보다 안정적으로 국내에 남아서 할 수 있는 국내 박사, 공기업 취업, 대기업 연구원 등의 선택지가 추가되었다.


남편과 나는 아이를 재우고 매일 밤 우리 가족에게 어떤 선택이 가장 좋을지에 대해서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남편은 자신이 연구하는 분야에 꽤나 큰 자신감과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나는 그런 남편을 끝까지 믿고 응원해 주기로 결정했다. 한국에 있든, 미국에 가든 박사 과정에 도전해 보라고, 나는 내가 원하던 직업을 이미 가졌고, 휴직은 연장할 수 있으니 이번엔 당신이 꿈을 이루어 보라고. 아이와 내가 당신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겠다고. 미국에 가더라도 내가 온전히 육아와 살림을 맡을 테니 그저 연구에만 집중하라고 그렇게 말했다. 새로운 도전에 앞서 나도 참 비장해졌던 것 같다. 그렇게 남편은 석사 졸업 후 미국 대학원에 원서 접수를 했다.


양가 집안에 해외로 유학을 다녀온 케이스가 전혀 없었기 때문인지 부모님들은 우리의 무모한 결정에 걱정이 많으셨다. “이제 아이도 있는데 30평대 아파트로 이사 가서 한국에서 안정적으로 쭉 사는 게 어떻겠냐 “, ”미국 대학원에 합격은 할 수 있는 것이냐 “, ”미국에 가더라도 아이까지 세 사람이 거기서 어떻게 살아가려고 하냐 “, “대학원에 합격을 하더라도 졸업을 무사히 할 수 있는 것은 맞냐”, ”박사 학위를 딴 후의 계획은 세운 것이냐 “, ”그냥 가족들 곁에서 남들처럼 평범하게 사는 게 좋지 않겠냐 “ 통화를 할 때마다, 식사 자리를 할 때마다 늘 마지막은 우리의 선택과 미래를 걱정하는 말로 끝이 났다. 부모님과의 대화 후에는 늘 기분이 안 좋았다. 그저 응원해 주시고, 잘할 수 있을 거라는 말이 듣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부모님의 반응은 그와는 정 반대였기에 마음속에 불안의 씨앗이 자라났다. 사실 우리도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저희도 아직 확신은 없어요. 그런데 한 번 해보려고요. 할 수 있게 만들어 보려고요. 들어보니 오히려 미국이 어린아이를 육아하기엔 좋은 환경이라 하더라고요. 만약에 박사 학위를 못 받고 돌아오더라도 남편이 한국에서 이러이러한 직업을 구할 수 있을 거예요. 저도 바로 복직을 하면 되고요. “ 그때 할 수 있던 나의 최선의 대답이었다. 남편과 나, 두 사람 다 아직 젊었기에 할 수 있었던 젊은 날의 패기와 도전이 아니었을까?


그 해 가을밤,


“여보, 나 합격했어!!”


남편이 미국 대학원 첫 합격 메일을 받았다. 우리의 도전이 허황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받은 기분이었다. 이 날 이후로 남편은 지원했던 모든 대학원에서 합격 메일을 받았다. 우리 세 가족은 케이크를 사고 촛불을 불었다. 꺼지는 촛불과 함께 우리의 도전은 시작됐다. 잘못된 선택은 없다. 무엇이 됐든 우리가 그 선택을 옳은 선택으로 만들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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