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도착하고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서 처음 느낀 것은 ‘와, 말 정말 빠르다!’였다. 학창 시절 영어는 국어 다음으로 내가 제일 좋아하던 과목이었다. 단어 외우고, 문법 외우고, 지문 읽고, 문제 풀고.. 반복하다 보니 수능 영어 1등급은 그리 어려운 게 아니었다. 별다른 준비 없이 쳤던 토익시험에서도 900점. 난 내 영어가 평균 이상이라 자부했었다. 하지만 나는 한국의 영어 교육 시스템에, 그저 ‘영어 시험’에 특화된 사람이었던 것뿐이었다. 미국에 온 순간 나는 지금껏 한국에서 공부했던 영어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말 그대로 실생활에서 ‘쓸 데가 없는’ 영어 공부를 했던 것이다.
현지 미국 사람들 말이 얼마나 빨랐냐면, 미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이가 아파 소아과에 가야 했던 날이 있었다. 미국은 한국과 다르게 예약 없이 의사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 동네 소아과 번호를 찾아 소아과 직원과 전화 통화를 시작했다. 통화를 하는 내내 영어가 들리지 않아 어찌나 진땀이 나는지.. 딸의 기본 정보를 알려주고 예약 날짜를 잡는 간단한 통화였음에도 “Sorry, can you say that again?", "Sorry, can you slow down a little bit?"을 몇 번이나 외치며 힘겹게 예약을 마쳤다.
‘하... 간단한 전화도 이렇게 힘든데 병원 가서 의사, 간호사를 직접 만나면 정말 힘들겠다...’
예약 시간에 맞춰 소아과에 도착했다. 그렇게 처음 접한 미국의 소아과는 예상보다 정말 조용하고, 잘 정돈되어 있었으며, 정말 친절했다. 간호사 선생님, 의사 선생님 모두 활기차고 상냥했다. ’ 뭐야, 괜히 긴장했네, 다들 친절하고 할 만 한데?‘ 생각하는 순간 의사 선생님께서 우다다다다다 내 아이의 증상에 관해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와.... 그 말 속도가 어찌나 빠르던지.. 모르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랬다간 진료 시간이 2시간을 걸릴 것 같았다. 중간중간 겨우 들리는 아는 단어를 종합해서 대충 의미를 파악했고, 그렇게 내가 이해한 게 맞는지 확신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폭풍 같았던 첫 소아과 진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어찌나 허탈하고, 어찌나 내가 작게 느껴지던지.. ‘말도 안 통하는 이 나라에서 내 아이를 키우면서 남들만큼 정상적으로 살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나를 짓눌렀다. 집에 돌아와 휴대폰 녹음기를 확인했다. 의사 선생님의 중요한 말을 놓칠까 봐 혹시 몰라서 휴대폰 녹음 기능을 켜 놓았던 것이다. 다시 녹음 내용을 듣는데도 이런.. 녹음을 하면 뭐 해.. 다시 들어도 모르는데.. 그날 이후로 내 영어 목표는 “우리 딸 담당 의사 선생님 말씀 알아듣기”가 되었다. (미국 병원에는 통역 시스템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분들 중 영어가 어려운 분들은 통역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다.)
태어나고 자란 나라를 떠나서 산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한국에서 막연하게 상상하던 해외 생활과는 차원이 다른 ‘현실’을 마주해야만 한다. 한국에서는 누구에게나 당당하게 말을 잘했고, 부족함을 느끼지 않아도 됐었는데 이곳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언어가 부족하니 사람들과 관계 맺는 것도 어렵고, 영어를 써야만 하는 상황에 놓일 때마다 몸은 긴장 상태가 된다. 그리고 나 스스로가 너무 한심하고 부족하게 느껴지는 순간을 어쩔 수 없이 맞닥뜨리게 된다. 그래도 이렇게 힘든 시간이 있는 만큼 분명히 훗날 편해지고 발전하는 걸 느낄 수 있겠지? 노력하면 되겠지? 얼른 몸도 마음도 편해지는 그날이 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