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부 광복을 향한 마지막 노력과 좌절
1장: 중국과의 협력과 한중연대
한인 애국단의 결성과 의거 활동
한인 애국단은 1931년 김구에 의해 결성된 항일 무장투쟁 조직으로, 주로 중국 상하이와 난징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김구는 이 단체를 통해 무장 독립운동을 강화하고자 했고, 일제의 주요 인물을 암살하는 등의 직접적인 행동을 펼쳤다. 대표적인 예로,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의 폭탄 투척 사건이 있다. 이 사건은 일제 주요 지도부를 직접적으로 겨냥한 공격으로,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중국 국민당 정부와의 협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인 애국단의 의거 활동은 단순한 테러가 아니라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무장 독립운동의 일환이었다. 이들의 행동은 일제의 고위층을 타격함으로써 독립운동의 강력한 의지를 세계에 알리고, 새로운 국가 건설의 필요성을 더욱 절박하게 만들었다. 김구는 이러한 활동을 통해 한국 민족의 자주성을 강조하며, 독립운동이 단순한 외교적 노력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을 부각했다. 특히, 일본의 식민지 통치에 대한 전면적인 저항을 통해 일제의 지배 질서에 직접 도전하였고, 이를 통해 국제 사회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임시정부와 중국 국민당 정부의 협력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 국민당 정부와 밀접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중국 국민당 정부는 일본과의 대립 구도 속에서 한반도의 독립운동을 지원할 필요성을 느꼈고, 임시정부와의 관계를 중요시했다. 특히 윤봉길 의거 사건 이후 장제스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였고, 이를 통해 임정의 활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중국과의 협력은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에 중요한 힘을 실어주었다. 장제스는 임정이 중국 내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안전한 피난처를 제공하고, 독립운동가들이 무장 투쟁을 이어갈 수 있도록 물질적, 군사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협력은 단순히 한중 간의 외교적 관계를 넘어서,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한 공동의 목표를 지닌 연대였다. 중국은 한반도의 독립을 자신들의 안보와 직결된 문제로 보았고, 이를 통해 한반도에 자주적인 국가가 세워질 수 있도록 지원했다.
김구의 상해 탈출과 임정의 재건
김구는 상하이에서 활동 중 일본의 추적을 피해 여러 차례 위기를 맞았으나, 이를 극복하고 임시정부를 재건하는 데 성공했다. 상하이 탈출 이후 김구는 중국 내 다양한 지역으로 이동하며 독립운동을 이어갔고, 임정의 지도력을 유지했다. 특히,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임시정부는 난징, 충칭 등지로 이전하며 활동을 이어갔다.
김구의 이러한 노력은 단순한 생존을 위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그는 임시정부가 해체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재조직하고, 임정 내 다양한 독립운동 세력 간의 결속을 강화하였다. 이는 임시정부가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한 중요한 요소였다.
김구와 이승만의 갈등과 그 의미
임시정부 초기부터 김구와 이승만은 독립운동과 새로운 나라 건설에 대한 근본적인 차이를 보였다. 이승만은 외교적 수단을 통해 미국을 최대한 활용하여 독립을 쟁취하려 했고, 이를 통해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고자 했다. 그는 국제정세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으며, 특히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질서를 주도할 것이라는 점을 간파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승만은 미국과의 협력을 최우선으로 삼으며 외교적 노력을 통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반면, 김구는 무장투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일제와의 직접적인 무력 충돌을 통해 독립을 얻고, 이를 기반으로 자주적인 국가를 세워야 한다고 믿었다. 김구에게 독립운동은 단순히 외교적 협상에 의존할 수 없는 문제였으며, 국민의 자주성과 투쟁 정신을 고취시키는 것이 중요했다. 그는 무장투쟁을 통해 국민의 의식을 일깨우고, 독립을 향한 강한 열망을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승만과 김구의 이러한 갈등은 단순한 개인적인 충돌이 아니었다. 이는 독립운동의 방향과 방법론에 대한 근본적인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승만이 외교적 접근을 통해 국제사회의 지지를 얻어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된 반면, 김구는 무장투쟁을 통해 독립을 이루고자 했으나, 광복 이후에는 그의 전략이 한계를 맞이했다.
5. 해방 이후의 좌절과 의미
1945년 일본이 항복하고 대한민국은 해방을 맞이했으나, 김구가 이끌던 광복군은 실질적으로 한반도에 진입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미군정과 소련의 분할 점령으로 인해 광복군의 역할은 미미해졌고, 이승만의 외교적 전략이 결국 독립운동 내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는 김구의 무장투쟁 중심의 독립운동이 예상치 못한 좌절을 맞이한 순간이었다.
김구는 해방 이후에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가고자 했으나, 그의 무장투쟁 노선은 국제 정세와 국내 정치 상황 속에서 점점 힘을 잃어갔다. 반면, 이승만은 외교적 전략을 통해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을 이끌어내며 건국의 지도자로 자리 잡았다. 이승만과 김구의 갈등은 독립운동의 방법론적 차이를 넘어서, 대한민국 건국의 방향성을 결정짓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김구와 이승만의 이 같은 갈등은 대한민국의 건국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광복 이후에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법적으로 존속할 수 있었으나, 정치적 현실 속에서 임시정부의 법통은 이승만 중심의 정부 수립 과정에서 점차 배제되었다. 이는 김구에게 큰 좌절을 안겨주었으며, 결국 그는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게 된다.
2장: 국내 항일운동과 여운형의 활동
1. 국내 항일운동의 조직화와 그 어려움
3.1 운동 이후 일본의 통치 방식은 강압적인 무단 통치에서 유화적인 문화 통치로 바뀌었다. 하지만 이 변화는 표면적이었고, 식민 통치는 여전히 억압적이었다. 이에 국내에서 독립을 위한 항일운동은 지속되었다. 항일운동은 여러 형태로 전개되었는데, 조직적인 측면에서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조직적인 독립운동의 최대 난관 중 하나는 일제의 철저한 감시와 탄압이었다. 일제는 민족주의자들의 활동을 감시하기 위해 철저한 정보망을 구축하고,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고 고문하며 공포 정치를 펼쳤다. 경찰, 헌병 등 강력한 치안 조직을 통해 독립운동을 사전에 차단하거나 분열시키려는 노력도 있었다. 이는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해외로 망명하거나, 국내에서 은밀한 활동을 해야 하는 이유가 되었다.
또한, 항일운동은 단일한 조직에 의해 주도되지 않았고, 다양한 세력들이 각기 다른 목표와 방법론을 가지고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좌파와 우파의 이념적 갈등은 조직의 통합을 방해하는 주요 요인이었다. 좌파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적 이념을 바탕으로 한 혁명적인 독립을 주장했고, 우파는 민족주의에 기반한 독립을 강조하였다. 이런 이념적 갈등은 항일운동 내에서 단합을 방해하고, 일제의 분열 통치 전략에 더욱 취약하게 만들었다.
여기에 일제의 경제적 착취로 인해 민중들은 생계에 급급했으며, 독립운동에 참여할 여력이 부족한 경우가 많았다. 특히 농민과 노동자들은 일제의 수탈과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2. 여운형의 건국동맹 활동
여운형은 일제강점기 동안 국내외에서 활발히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 지도자였다. 그는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독립운동을 지속하며, 특히 1940년대 초반에는 '건국동맹'을 결성하여 해방 후의 독립 국가 건설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건국동맹은 여운형이 주도한 비밀결사로, 일제의 말기였던 1944년에 조직되었다. 이 조직은 민족 해방을 목표로 하면서도, 독립 후의 국가 건설을 위해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여기서도 정확하게 여운형은 건국운동을 한 것이 명확하게 설명된다. 우리는 조선과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과 건국운동을 같이 이해해서는 절대 안 되는 이유이다.
여운형은 건국동맹을 통해 일제 강점기 말기에 점차 약해지던 독립운동의 불씨를 되살리고, 일제 패망 이후를 대비하려 했다. 특히 그는 민족의 통합을 중요하게 여겼다. 좌우 이념을 초월해 독립을 이루고자 하는 여운형의 노력은 건국동맹의 목표에도 반영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좌우 간의 이념 대립은 심각했다. 여운형은 통합적 리더십을 발휘하며 좌우 세력 간의 화합을 도모했으나, 좌파와 우파의 의견 차이는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건국동맹의 중요한 활동 중 하나는 민족 해방 이후의 국가 체제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여운형은 독립 후의 한국이 민주주의 국가로 나아가야 한다고 보았고, 사회적 평등과 민족 자주를 강조했다. 또한 그는 독립 후 사회주의적 요소가 포함된 새로운 국가 체제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 때문에 건국동맹은 좌파 성향이 강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여운형은 끝까지 민족의 통합을 우선시했다.
3. 일제의 탄압과 민족운동의 변화
1930년대 후반부터 일본은 더욱 강력한 탄압 정책을 시행하며 항일운동을 탄압했다. 특히 만주사변(1931년)과 중일전쟁(1937년)을 기점으로 일본의 군국주의가 강화되었고, 이는 한반도 내에서도 더욱 엄격한 통치를 가져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국내의 항일운동은 점차 지하로 숨어들었고, 해외 독립운동과의 연계가 더욱 중요해졌다.
일제의 강압적인 정책은 단순히 정치적 탄압에 그치지 않았다. 경제적 착취, 민족 말살 정책, 그리고 강제 징용과 같은 극단적인 수탈 정책이 병행되었다. 이에 따라 항일운동은 민족의 생존과 독립을 위한 투쟁이라는 성격을 더욱 강하게 띠게 되었다. 독립운동가들은 이러한 일제의 압박 속에서도 민중을 조직하고 항일운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1940년대에 접어들며 독립운동의 방식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해외에서의 독립운동과 국내의 항일운동이 보다 긴밀히 연결되기 시작했고, 특히 임시정부와의 연계가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또한 민중의 요구도 변화하였으며, 독립 이후의 국가 체제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었다. 이러한 논의 속에서 사회주의적 이념이 대두되었고, 노동자와 농민들이 독립운동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특히 여운형과 같은 지도자들은 단순히 독립만을 목표로 하지 않고, 독립 이후의 새로운 사회 체제를 구상하며 민중의 요구를 반영하려 노력했다. 이는 독립운동이 단순한 항일 투쟁을 넘어, 건국운동으로 발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여운형의 건국동맹을 포함한 여러 조직은 일제의 강력한 탄압에 의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결국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4. 국내 항일투쟁의 지속과 민족운동의 다양화
일본의 탄압이 점점 강화되면서 국내의 항일운동은 더욱 암암리에 이루어졌다. 1930년대 이후 일본의 군사적 팽창과 더불어 강압적인 정책이 더욱 강화되었고, 이는 국내 항일운동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일운동은 계속해서 조직되었으며, 특히 일제 말기에는 노동자, 농민, 청년들에 의해 독립운동이 주도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사회적 요구와 함께 민족의 독립을 외쳤고, 이는 독립운동의 새로운 흐름을 형성하게 되었다.
결국 여운형의 활동과 국내 항일운동은 민족의 독립을 위한 중요한 투쟁이었으며, 해방 후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좀 더 다른 시각에서 말하자면 상층부 지도자들은 이미 기존의 대한제국 즉, 왕이 있는 나라가 아닌, 그 나라의 독립이 아닌 새로운 나라 건설이라는 건국운동 개념이 되어버린 지는 이미 오래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