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아는 사무실에 앉아 손끝으로 키보드를 두드리며 마감 기한에 쫓기고 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거리는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가득했다. 가게들은 화려한 조명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사람들은 선물 가방을 들고 바쁘게 거리를 오갔다. 하지만 유진아는 그 모든 화려함이 자신에게는 아무 의미 없다는 듯, 그저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만을 느낄 뿐이었다.
"유진아, 크리스마스 선물 준비했어?" 팀장 김정혜가 유진아의 책상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손에는 화려하게 포장된 작은 선물이 들려 있었다.
"음... 아직이요, " 유진아는 잠시 키보드를 멈추며 대답했다. "별로 크리스마스가 신경 쓰이지 않아서요."
"왜? 요즘 다들 분위기 타는데, " 김정혜가 웃으며 말했다. "이번 크리스마스 파티 때, 커플로 오지 않으면 좀 이상할걸?"
"그냥... 혼자서 조용히 보내는 게 더 편할 것 같아요, " 유진아는 고개를 저었다. "사실, 크리스마스라는 날이 왠지 더 외롭게 느껴져서요."
김정혜는 잠시 말을 멈추고 유진아를 바라보았다. "외롭다니? 그럴 리 없잖아, 넌 항상 일 잘하고 사람들도 다 좋아하는데. 혼자라고 느껴지면 왜 그런지 한번 생각해 봐."
유진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김정혜의 말이 맞았다. 사무실 사람들, 친구들, 모두 자신에게 관심을 보였고, 유진아도 사회적 관계를 잘 유지해 왔다. 그런데도 왜 매년 이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때마다 혼자라는 느낌이 드는 걸까? 유진아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냥 마음속 깊은 곳에서, 크리스마스라는 특별한 날이 더욱 외로움을 부추기는 느낌이었다.
"그냥 그런 거죠. 어쩔 수 없는 거니까, " 유진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도, 이번 크리스마스엔 좀 더 즐기자고. 친구들 만나고, 파티도 가고!" 김정혜가 말했다. "너도 올 거지? 다들 기다린다고."
유진아는 잠시 머뭇거렸다. 팀장에게는 예의상 참석한다고 말했지만, 사실 마음은 그리 내키지 않았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올수록, 그녀의 마음은 점점 더 무겁게 느껴졌다.
그때, 유진아의 동료인 박혜영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박혜영은 유진아가 일하는 기자실의 전통적인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일에 열중하는 유진아에게 가끔씩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전하기 위해 찾아오는 인물이었다.
"유진아, 크리스마스이브 파티 간다며?" 박혜영이 물었다.
"글쎄... 별로 가고 싶지 않은데, " 유진아는 짧게 대답했다.
박혜영은 유진아의 표정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너 크리스마스만 되면 항상 이런 표정 짓지. 너, 진짜 뭐가 걱정인 거야?"
유진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그냥... 아무리 크리스마스가 돌아와도 뭔가 특별한 감정이 생기지 않아. 나만 그런 거겠지?"
박혜영은 잠시 생각한 뒤, 유진아의 책상 앞에 앉았다. "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나도 사실 예전에는 그랬어.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때마다 혼자 있는 것 같고, 뭔가 자꾸 외로워졌었지. 그런데 어느 날, 그냥 생각을 바꿨지. 크리스마스를 즐길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잖아. 혼자 보내도 좋고, 친구들과 보내도 좋고."
"그러게요. 나도 그냥 혼자서 보내는 게 제일 편하다고 생각했어." 유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뭐랄까, 그런 날이 되면, 내가 누구와 함께 있는지, 뭘 하고 있는지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는 거 있지?"
박혜영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그렇긴 하지. 나도 그랬어. 크리스마스에 대해서 너무 많은 기대를 했더니, 오히려 실망만 커지더라고. 그래서 이제는 기대를 좀 덜 하려고 노력해. 그냥 그날이 지나면 또 다른 날일 뿐이니까."
박혜영의 말에 유진아는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사실 크리스마스를 다른 사람들의 기준에 맞추려 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 날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느꼈다. 그렇게 유진아는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래, 그럼 이번 크리스마스엔 나도 나만의 방식으로 보내기로 해보자, " 유진아는 결심했다. "그리고 내일은 크리스마스 마켓이라도 가볼까?"
박혜영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내일 같이 갈까? 멋진 시간을 보내자고!"
진아는 어느 정도 마음을 다잡고 나서 사무실에서의 일을 마무리했다. 일단 크리스마스라는 날에 대한 마음의 부담은 덜어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녀의 머릿속에는 친구들과의 파티와 거리에서 자고 있는 노숙자의 베개가 하루 종일 그림처럼 떠올랐다.
퇴근 후 진아는 다시 어제 갔던 그 거리를 찾았다. 일부러 간다는 생각이 왠지 들키기 싫어서 인지 괜히 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어제의 노숙자가 있던 자리까지 가보았다. 그런데 어제 보았던 그 노숙자는 보이지 않았다. 진아는 걱정과 함께 자신의 마음을 섞어서 이젠 더 노골적으로 노숙자를 찾기 시작했다. 빌딩 사이를 지날 때쯤 골목에 한 노숙자가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고 직감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진아는 119에 신고를 해서 노숙자를 구해주었다. 구경하는 사람들이 다 돌아간 후 골목 주변은 진아에게 너무 낯선 풍경처럼 슬프게 다가왔다.
그 순간 다시 진아의 눈에 들어온 것은 낡은 배게 하나였다. 그 베개는 조금 길쭉했고 그리 높지 않아 어릴 적 베고 잤던 악어 베개를 연상케 했지만 너무 낡고 오래된 탓에 냄새가 고약했다.
진아는 그 베개를 들고 가까운 빨래방으로 가서 깨끗하게 빨았다. 그리고 다시 그 자리로 갔다가 노숙자가 다시 돌아오는 날 돌려주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배게를 집으로 가져갔다.
집에 도착해서 진아는 가지고 온 베개에서 눈을 떼질 못했다. 참 이상하게 베개가 낯설지 않은 기분에 한동안 베개를 품에 안고 있었다. 순간 진아는 어린 시절 행복했던 기억에 빠졌다. 규리가 막 도착했을 때 진아는 정신을 차렸고 저녁을 먹고 규리와 차 한 잔과 얘기를 나누었다.
규리야! 내가 할 말이 있어.
진아는 마치 전쟁에 나가는 군인처럼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