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혁명
1894년 조선. 탐관오리의 수탈, 외세의 압박, 봉건 질서의 폐해 속에서 민중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경상도 고부에서 시작된 소규모 농민 봉기는 전국적으로 번져갔고, 이내 '동학농민혁명'으로 불리는 대규모 민란이 되었다.
이들은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제폭구민(除暴救民)'을 외치며, 반봉건·반외세의 기치를 들었다.
단순한 세금 저항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정치적 상상력이 동원된 혁명이었다.
그러나 동학군은 결국 전주성 점령 이후 훈련도감과 정부군, 그리고 청·일 양국의 개입으로 진압당한다.
2차 봉기는 더욱 격렬했지만, 조직은 흩어졌고, 지도자는 살해당하거나 처형되었다. 그들의 외침은 들렸으나, 그 외침을 지탱할 수 있는 구조는 존재하지 않았다.
순자는 『예론(禮論)』에서 이렇게 말한다:
성인은 인정을 따르지 않고 예를 따른다.
(聖人不從人情而從禮)
감정은 일시적이고 폭발적이지만,
예(禮)는 그 감정을 사회적으로 지속 가능하게 만든다.
동학혁명은 분명 감정과 윤리의 에너지를 갖고 있었으나, 그것을 구체적인 정치 제도로 번역할 구조를 갖추지 못했다.
봉건 질서를 무너뜨리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 다음을 어떻게 구성할지에 대한 제대로 된 계획은 없었다.
푸코의 권력 이론은 이 구조 부재의 맹점을 드러낸다. 조선 말기 정부는 폭력적 억압만으로 통치하지 않았다.
권력은 면세자와 과세자, 사대부와 농민, 문과와 무과로 구획된 복잡한 신분 분절 시스템 안에 숨어 있었다. 농민들은 그 틀을 부수고자 했지만,
그 틀을 대체할
새로운 제도 설계는 갖고 있지 못했다.
아렌트는 『혁명론』에서
“혁명의 본질은 시작할 수 있는 힘(potentia initii)에 있다”고 말했지만, 그 시작은 반드시 지속 가능한 제도적 질서와 연결되어야만 한다.
동학군은 시작할 수 있는 힘은 있었지만,
유지할 수 있는 그릇은 없었다.
* 시작할 수 있는 힘
한나 아렌트는 『혁명론』에서 혁명의 본질을 “시작할 수 있는 힘(potentia initii)”에 있다고 본다.
그녀에게 혁명은 단순한 체제 전복이 아니라,
인간이 새로운 정치적 질서를 ‘시작’하는 창조적 행위이며, 이는 인간의 본질적 조건인
‘탄생(natality)’에서 비롯된다.
아렌트는 혁명이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유와 공공성을 창설하는 새로운 공적 영역의 탄생임을 강조한다.
이러한 ‘시작의 힘’은 복수의 개인들이 의식적으로 참여하여 자유를 세우는 행위에서 실현되며, 인간은 이 창설의 능력을 통해 예측 불가능한 새로운 역사를 열어갈 수 있다고 본다.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혁명저지 세력의 탄압 구조는
지리적, 시대적 배경으로 인해서 미얀마, 홍콩, 이란과는 또 다른 다음과 같은 특성들을 보여 준다
동학혁명은 무력으로만 진압된 것이 아니라,
내부 분열을 유도하고,
지도자만 제거하고,
외세를 끌어들이고,
사상은 종교로 분리시킴으로써
감정을 해체하고 구조화되지 못하게 만든
전형적 푸코적 통치의 사례다.
이것은 단순한 폭력이 아니라
감정의 제도화를 봉쇄한 권력의 기술이었다.
이 실패는 현대에도 유효한 교훈을 준다.
감정과 윤리는 한 시대를 흔들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지속할 구조가 없다면,
윤리도 결국 기억에서 사라진다.
동학은 울림이었지만, 메아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것이 구조(G)가 결여된 네 번째 실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