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25일
우리나라에는 종교의 자유가 있고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종교를 믿고 있는데, 나는 종교를 갖지 않고 사는 쪽이라 종교적인 삶에 대해서는 익숙하지가 않다. 게다가 서구에 많이 치우쳐 있는 우리의 일상 때문에, 세계적으로 영향력이 아주 큰 종교인데도 이슬람교나 힌두교에 대해서는 더더욱 문외한이다. 그중에서도 이슬람교는 천 년이 넘도록 기독교 문명과 대립해 온 역사가 있어서 그런지, 우리나라는 기독교 국가가 아닌데도 은연중에 이슬람교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많이 퍼져 있다. 그러다 보니 이슬람 문화를 소재나 배경으로 하는 책은 접하기가 어려웠고 있다 해도 선뜻 손이 가지는 않았다. 이슬람교와 관련된 책을 지금까지 몇 권이나 읽어 봤나 꼽아 보니 기억나는 게 10 권이 채 되지 않는다. 이번에 읽은 소설은 10권도 되지 않는 그 목록에 올라가게 되는 소설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느끼는 정서는 다른 소설을 읽을 때와는 그 모습이 좀 달랐다. 보통의-평범하다는 뜻은 아니다- 좋은 소설을 읽을 때는 그 소설 자체의 이야기와 문장에 집중하게 되는데, <낙원>을 읽는 동안에는 그보다는 작품 전체를 감싸는 특유의 분위기가 마음속을 채웠다. 아프리카 출신 작가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 까닭에, 읽기 시작한 초반에는 이 특유의 분위기가 아프리카 또는 작가의 고향인 탄자니아의 정서인가 생각했다. 하지만 좀 더 읽어가면서 중반에 접어들자 이 정서, 이 분위기가 낯설지 않고 예전에도 어딘가에서 느낀 적이 있음을 깨달았다. 책을 잠시 덮고 이 느낌의 기원을 찾아 마음속을 거슬러 오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작년에 읽었던, 그리고 십몇 년 전에 읽었던 두 권의 소설에 다다를 수 있었다. 2021 년에 읽은 이보 안드리치의 <드리나강의 다리>와 2006 년에 읽은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
이 책들의 표지가 떠올랐고, 펼쳐 들고 읽었을 때 마음에 드리웠던 감정과 분위기를 계속 더듬어 나갔다. 마침내 <낙원>에서 느낀 특이하면서도 이 작품들을 관통하고 있는, 낯설지 않은 정서의 정체를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이슬람교였다. 세 소설은 작가도 다르고 시간과 공간의 배경도 모두 다르다, 원작이 쓰인 언어도 각각 다르고. 그 많은 다름의 벽을 뚫고 나에게 같은 느낌, 같은 이미지로 묶여서 다가오는 이유는 이슬람교, 보다 정확하게는 이슬람교에서 비롯하는 정서에 있다.
나에게 이슬람교란 두어 권의 책과 구글 검색 정도로만 접할 수 있는 피상적인 형태의 종교이지만, 알라신이 없는 세상은 상상해 본 적 없는 이슬람교도에게 이슬람교는 삶 자체일 것이다. 소설 속의 인물들은 독실하든 아니든 모두 이슬람교를 모태 신앙으로 가진 무슬림이다. 그래서 탄자니아 내륙 깊숙한 곳에서 사는 알라를 믿지 않는 부족들을 야만인이라며 무조건 비난하고 본다. 돈에 목숨 거는 상인, 외로움과 성적 욕망에 몸부림치는 늙은 부인, 남몰래 만든 밀주를 홀짝이는 자동차 운전사-심지어 쿠란을 스와힐리어로 번역하겠다는 불경한 발언도 내뱉는다-, 글자를 몰라 쿠란을 읽어보지도 못한 또 다른 많은 이들, 알라신이 있다면 벼락 한 자락씩 내려 마땅할 이 인간들이 모두 알라 이외의 신은 생각지도 않는 무슬림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다른 종교의 신자들 혹은 무신론자들과 다를 바가 없지만, 무슬림들에게는 그들 특유의 체념과 순응의 정서가 있다. 인간적인 욕망과 인생의 가치를 위해 몸부림치다가도 그것이 좌절될 때 순순히 신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물러선다. 자신은 아무런 죄가 없는데도 감내해야 하는 운명의 고통 앞에서도 그것이 알라의 의지라 하며 조용히 순응한다. 부모의 빚 때문에 상인에게 팔려간 주인공 아이도, 큰 성공을 꿈꾸며 멀리 원정을 갔다 불운과 방해꾼들 때문에 실패하고 파산 직전에 몰린 또 다른 주인공인 상인도, 그 원정을 돕다가 불구가 된 그 누군가도 자신이 당한 처지에 억울함을 토로하지 않는다. 그 속마음이 얼마나 괴로울지는 누구도 알 수 없지만, 그들 모두 약속이나 한 듯 담담히 상황을 받아들인다, 어떤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다만 점점 흐려져 가는 부모의 기억에 안타까워하고, 채권자에게 빚을 갚기 위해 숨겨둔 비자금을 찾으러 다시 여행을 떠난다. 불구가 된 남자는 불만을 터트리기도 하지만 그것도 잠시이고 곧 어디론가 떠나 버린다.
그래서 이들의 행적을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인간의 삶 속에 존재하는 비극성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는데, 무작정 슬픔에 빠져들지만은 않게 되는 것이 체념과 순응 뒤에는 그 들만의 낙관주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좋은 일이 일어날 거라 기대하지 않으면서도 결국 삶은 계속 지속될 것이라는 단순한 진실에 기댄 낙관주의는 지켜보다 보면 헛웃음이 나오기도 하지만, 결국 우리의 고단한 삶을 지탱하는 힘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게 해 준다. 더 나아가서는 가혹한 운명에 맞서는 실존의 모습 한 조각을 보여주기도 한다. 실존이라는 어려운 말을 만들고 그보다 더 어려운 말들로 실존을 설명하는 프랑스의 여러 철학자들의 그 어떤 책들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직관적으로 우리가 왜 살아가는가에 대한 대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게 순응과 체념 속에서 피어오르는 낙관과 긍정으로 그들은 지금 그들이 살고 있는 그곳을 ‘이만하면 여기가 낙원 같지 않은가’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소설 제목이 <낙원>이다.
이쯤에서 소설을 마무리했어도 충분히 좋은 소설이지만 작가는 식민지 지식인만이 가질 수 있는 본능적인 예리함과 통찰을 살려 책에 긴장감을 뿌리면서 마무리를 짓는데, 바로 제국주의라는 맹수 앞에 무방비로 놓인 조국의 모습을 주인공 일행에 투영하며 소설을 끝맺는 것이다. 모든 갈등이 해소되고 평온을 되찾은 주인공 일행이 사는 마을에 독일군이 진군해 오고 -소설의 시대 배경이 세계 1차 대전이 터지기 직전이다- 주인공 일행이 그들을 피해 집안으로 숨는 모습으로 소설은 끝난다.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에 식민지의 고통을 겪었던 이 땅에 사는 사람으로서 주인공 유세프의 앞날에 가득 끼어 있는 먹구름을 보니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 닥쳐올 새로운 시련 앞에서도 부디 유세프에게 희망과 낙관이 남아 있기를 간절히 바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