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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영화와 도시...러브레터

2024년 2월 2일

by 행크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부모님을 따라 극장에 가서 <벤허>를 보았다. 극장을 처음 간 건 아니었다. 더 어릴 때 이런저런 만화영화 -<로봇 태권 브이>, <전자인간 337> 같은- 를 보러 극장을 가보았고, <엄마 없는 하늘 아래> 같은 영화도 극장에서 보았던 기억이 있지만, 내 기억에 진정 영화의 매력에 처음으로 빠져들었던 경험이 바로 <벤허>였다.


11살 어린아이가 4 시간 가까이 상영하는 긴 영화를 조금의 미동도 없이 지켜보았고,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도 많았지만 ‘이것이 영화구나!’하는 느낌을 처음으로 받았던 것이다. 그 뒤로 친구들과 혹은 혼자서 그리고 가족과 수많은 영화를 보러 다녔고, 그렇게 보아온 영화들은 내 인생의 깨어있는 시간 중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렇게 영화를 보다 보면 어떤 이유로 한 영화를 다시 보러 가는 경우가 가끔 생긴다. 어떤 이유라는 것이 대개는 그 영화가 아주 재미있거나 감동적이기 때문인데 당연히 극장에서 내려가기 전에 곧바로 보러 가곤 했다. 그중 몇 개를 꼽아보자면 중학생 때 <인디아나 존스> 2편부터 시작해서 <스모크>, <팔월의 크리스마스>, <브로크백 마운틴>, 최근엔 <클로즈>,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3편 같은 것이 떠오른다. 특히 저 <인디아나 존스>는 심지어 처음 본 그날 다시 본 경우이다.


지금 얘기하려는 영화도 처음 극장에서 본 후 다시 극장을 찾은 영화인데, 조금 특이한 것은 두 번째 보기 위해 다시 극장을 찾는데 시간이 25 년쯤 걸린 것이라고 할까.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 레터>


지난 세기인 1998년 여자 친구와 보러 갔던, 그리고 2023년, 이젠 아내가 된 그 여자친구와 중학생 딸아이와 함께 두 번째로 보았던 영화. 벌써 작년이 되어버린 2023년, 신촌 메가박스에서 잠깐 재개봉을 했는데 다시 한번 큰 화면으로 보고 싶어 가족이 함께 다녀왔다.


신촌 메가박스는 신촌, 이대 상권이 무너지는 바람에 쇠락해 버린 큰 상가 건물에 극장만 덩그러니 있는 그런 곳인데, <러브레터> 같은 옛날 영화를 보는 데에는 오히려 어울리는 정취가 있어 나쁘지가 않다. 시간이 되자 화면이 밝아지면서 영화는 주인공의 사연 있는 얼굴과 눈 덮인 언덕이 가득 찬 화면으로 시작된다. 영화를 따라가다 보니, 큰 줄거리는 대충 기억이 맞지만 내가 이 영화를 보기는 했던 건지 의심이 들만큼 새롭게 눈에 들어오는 장면이 많았다.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인 20 대 나이는 이와이 슌지 감독의 섬세한 연출과 묘사를 다 이해하기엔 좀 부족했나 보다. 25 년의 시간이 휘발시켜 버린 기억들도 많겠지만 이제는 주인공들 뿐만 아니라 주변의 인물들의 얼굴과 이야기도 눈에 들어오게 된 것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과거에는 막연히 다른 나라의 어떤 곳이라 생각하고 무심히 넘어갔던 배경들이 이제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모습으로 느껴졌던 것도 있을 것이다.


영화는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면서, ’오타루’와 ‘고베’ 두 도시를 오가며 진행되는데, 아무래도 이 영화에서 중요한 공간은 오타루이다. 그리고 영화 속 오타루는 다양한 계절을 보여주지만, 이상하게도 관객의 마음에는 겨울의 오타루만이 남는다. 결국 영화를 다 보고 나오며 언젠가 겨울이 되면 한 번은 가보아야 할 도시로 기억하게 된다.


세상의 많은 영화들 중에 관객의 기억에 남아 오랜 생명력을 가지는 영화들은 각자의 이유가 있기 마련인데, 이 영화 <러브레터>는 눈과 한 작은 도시로 사람들 사이에 이야기되는 영화이다. 일본 사람들에게 혹은 오타루 주민들에게 오타루라는 도시는 어떤 이미지였는지 알 수 없지만 나처럼 이 영화를 통해서 오타루를 알게 된 사람들에게 오타루라는 곳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임에도 내 마음 한 조각이 이미 가있어서 언젠가는 그 마음을 만나러 가야 하는 노스탤지어 같은 곳이 되어 버렸다.


결국 얼마 전인 1월 말 겨울의 오타루를 찾아갔고, 영화를 보면서 가졌던 기대와는 조금 다른 방식 -너무 많은 눈으로 기차 운행이 중지되거나 심한 눈보라에 몸이 날아가는 경험도 해봤다- 으로 큰 인상을 남겨주었다. 뭐, 안 좋았다는 뜻은 아니고 오타루의 매운 겨울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는데 그 나름대로 오래오래 기억할 것 같다. 약간의 설명을 덧붙이자면 <러브레터>의 로맨틱한 정서보다는 <드라이브 마이카>에서의 ‘세상의 경계’에 와있는 느낌이 더 컸지만, 아무러면 어떤가, 좋은 추억 하나 만들어지면 여행객에겐 그걸로 충분한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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