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X세대와 함께한 대한민국 사회
한 친구가 있었다. 그는 충북 옥천군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엄마는 가출했고 아버지는 농약을 마시고 죽었다. 그리고 그는 시각장애가 있었지만, 가난해서 치료도 받지 못하고 자랐다. 그런 그는 친구에게는 따돌림당했고, 사회에서는 버림을 받았다. 손을 잡아주거나 도움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신을 외면하는 세상에 그는 복수하고 싶었다.
1991년 10월 19일 토요일, 여의도 광장. 사람들은 가족과 함께 또는 연인과 함께 한껏 물오른 가을 정취를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프라이드 승용차 한 대가 광장을 질주하기 시작했고, 그 자리에서 어린이 두 명이 즉사(卽死)했다. 그는 눈을 감은 채 계속 질주했고 수많은 사람이 차에 치여 부상자가 되었다. 이후 시민들에 의해 붙잡힌 그는 21살 앳된 얼굴의 청년이었다.
영등포 경찰서로 끌려가면서 기자들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들이 마냥 즐겁게 노는 것을 보니 내 처지가 원망스럽고 세상에 대해 뭔가 복수를 하고 싶었다.”
“인간들이 다 개로 보였다. 더 못 죽인 게 한이다!”
그리고 그가 몰든 차에는 이러한 내용의 유서가 있었다.
“괴로워 죽고 싶다. 오늘 세상을 하직하기로 했다. 그러잖아도 힘겨운 세상, 눈까지 나빠 더욱 괴롭다. 세상이 싫다.”
그는 3심 모두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수가 되었다.
그날 여섯 살짜리 아이는 세발자전거를 타고 놀다가 갑자기 달려오는 차에 치여 즉사했다. 그 아이의 할머니는 손자를 하늘나라로 보낸 놈이 누구인지 보려고 그를 찾아갔다. 할머니가 본 그는 벌벌 떨면서 “잘못했습니다”를 계속 되뇌었다. 그 모습에 할머니는 그를 용서하고 옥바라지를 했다.
그는 누구보다 모범적인 수형생활을 했다.
1997년 12월 30일. 대한민국에서 마지막으로 23명의 사형수에게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23명 중 6년 동안 사형수 생활을 한 그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교수대에 오르기 전 자신을 돌보아 주던 수녀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인간 대접을 해주신 것에 감사드리며 짧게나마 인간답게 살고 갑니다.”
그는 1970년생 ‘김용제’였다.
또 하나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이 있었다.
1994년 9월 19일 추석 연휴 마지막 날, 지존파라는 엽기적인 살인 조직의 범행이 지상파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그들의 행동강령은 이러했다.
- 돈이 많은 자를 증오한다.
- 10억을 모을 때까지 범행을 계속한다.
- 배신자는 죽인다.
- 여자는 어머니도 믿지 말라.
그들은 범행대상에 대해 ‘잘 먹고 잘살고 몸에 힘주는 모든 사람’이라고 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벤츠나 그랜저를 등 고급 차를 몰고 다니는 사람을 범행대상으로 잡았다. 실제로 그들은 그랜저를 타고 다니는 사람에게 범죄를 저질렀고, 연습 삼아 사람을 죽였으며, 자신들의 아지트에 사제 감옥과 소각장까지 만들어 엽기적인 범행을 저질렀다.
조직원 한 사람의 연민에 의해, 살인을 당하지 않고 살아있던 한 여자의 탈출로 인해 지존파는 경찰에 체포되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검거 당시 카메라 앞에서 “돈 없다고 무시하는 것들, 압구정동 야타족들, 모조리 죽이지 못한 것이 한(恨)이다”며 사회에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당시 그들을 체포하고 사형장에서 죽을 때까지 돌보아 주고, 그들이 죽고 나서 가족이 거부한 시신까지 거두어준 경찰관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들은 사이코패스가 아니었어요. 우리 사회의 엄청난 상대적 빈곤이 괴물을 만든 겁니다.”
그리고 지존파의 두목은 수사를 받으면서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집이 너무 가난해서 크레파스조차 챙겨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담임 선생님은 그런 저를 친구들 앞에서 모욕하고, 옷까지 벗긴 채 수업 시간 내내 알몸으로 서 있게 했습니다. 수치스러웠습니다. 가난이 저주스러웠습니다. 그때 선생님이 그런 모욕을 주지 않았더라면 제가 오늘 이런 범죄자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지존파의 조직원은 8명이었고, 사회적 관심사가 대단했던 만큼 재판도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그중 6명에게 사형이 선고되었고, 사형집행도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지 일 년이 좀 지난 1995년 11월 2일에 집행되었다.
지존파 구성원은 이러했다.
김기환 1968년생 / 두목 / 국졸 / 사형 (당시 27세)
강동은 1972년생 / 부두목 / 중졸 / 사형 (당시 23세)
김현양 1972년생 / 행동대장 / 국졸 / 사형 (당시 23세)
문상록 1971년생 / 조직원 / 중졸 / 사형 (당시 24세)
백병옥 1974년생 / 조직원 / 국졸 / 사형 (당시 21세)
강문섭 1974년생 / 조직원 / 중졸 / 사형 (당시 21세)
김경숙 1971년생 / 조직원(여) / 국졸 / 생존 (1998년 석방 / 단순가담)
송봉우 1975년생 / 조직원 / 중졸 / 조직원에 피살 (당시 18세)
우리는 비지스의 ‘홀리데이(Holiday)’를 들으며 자살을 하려다 경찰에 의해 사살된 지강헌을 기억한다.
1988년 10월 8일 그는 영등포교도소에서 형기를 마치고 보호감호를 위해 공주치료감호소로 이송되는 중 함께 타고 있던 죄수들과 탈주하여 인질극을 벌인 사람이다. 그는 수차례에 걸쳐 560만 원을 절도한 잡범이었다. 이로 인해 그는 징역 7년과 더불어 전두환이 만든 보호감호 10년을 선고받았다. 7년의 형기를 모두 채웠지만, 또다시 형기보다 더 긴 10년의 보호감호 생활에 들어가야 하는 부당함에 사건을 저지른 것이다. 반해,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은 76억을 횡령하고도 7년을 선고받고, 3년 정도 복역 후 석방되었다.
인질극을 벌이던 당시 지강헌이 했던 유명한 말이,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였다.
이러한 ‘묻지마 범죄’는 범죄대상이 특정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묻지마 범죄’의 범죄대상은 이 사회의 부조리와 불평등, 그리고 무관심이었다.
경제가 발전하면서 이런 현상은 갈수록 심화되었다. X세대는 학창 시절 지존파의 두목인 김기환 같은 상황을 당했거나 목격을 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크든 작든 상대적 박탈감과 수모를 감내해야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부모님 학력 조사, 가정형편 조사, 도시락과 학용품 검사, 각종 회비와 모금 등 못살면 나쁘고 저급한 사람으로 취급당하고 때로는 인격 모독을 감내해야 했다. 이는 분명 우리 사회가 키워낸 괴물이 맞다. 앞으로 양극화가 심해질수록 더 크고 많은 괴물이 생겨날 것이다. 김기환도 국민학생 때는 반에서 1등 하는 우등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