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 언니 장례식에서 한 남자가 쓰러졌다. 사람들이 웅성거리자 남자의 아버지인 듯한 사람이 남자를 일으켜 세웠고 황급히 장례식장을 빠져나갔다. 남자는 쓰러지기 전에 언니의 영정 앞에서 소리 내어 울었다. 어떤 관계인지 단박에 눈치챘다. 본 적은 없지만 들은 적은 있는 언니의 남자 친구였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우리 회사 연구소장님 아들이라고 했다.
소장은 회사가 창립된 시절부터 함께한 원년 멤버다. 그래서 젊은 시절 가족들과 함께 이곳에서 지냈다. 가장 어렸던 막내는 초등학교를 윤희 언니랑 같이 다녔다. 언니는 이 동네 토박이다. 언니 말고도 언니 오빠도 회사 현장 쪽에서 일했다. 지역에 기반을 둔 광산업 분야 회사다 보니 직원들 중에는 이곳이 고향인 경우가 왕왕 있었다.
중학생이 되면서 서울로 떠난 남자는 방학 때는 가끔 소장님이 지내는 관사에 와서 머물다 갔다. 언니와는 전학 간 뒤로 왕래가 없었고 대학생이 되고 나서 청초하게 커버린 윤희 언니를 보고 어린 시절의 설렘을 고백했다고 한다. 언니의 연애 이야기는 퇴근 후의 소소한 즐거움 같은 거였다. 삼거리 피아노 학원을 같이 다녔는데 언니는 연습하다 말고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갓난아기를 돌보며 학원을 운영했던 원장님이 학원 윗층 살림집에 가 계신 틈을 윤희 언니는 놓치지 않았다.
- 소혜야, 이리 나와 봐.
언니는 피아노 학원 소파에 앉아 사랑을 머금은 소녀처럼 널뛰기하듯 설레고 요동치는 연애 이야기를 해 주었다. 회사 숙소에서 지내면서 집을 자주 못가 그런지 외로움이 싹트고 있었는데 언니의 이야기는 내가 사랑에 빠진 주인공처럼 액자소설의 중심축이 되는 아련하면서도 또렷한 감정을 느끼게 해 주었다.
- 신기하게도 나를 정말 잘 기억하고 있어. 내가 반찬을 계란말이만 싸 왔대. 그래서 자기가 케첩을 가져와서 준 적이 있대. 내가 너무 듬뿍 찍어 먹어 케첩이 떨어지면 자기 것으로 짜 주었대. 나는 전혀 기억에 없는데 말이야. 지금도 밥 먹으러 가면 꼭 계란말이 시켜.
- 오늘은 주말에 못 내려온다고 전화 왔어. 시험기간이래. 좀 보고 싶긴 한데 내가 올라가도 되지만 공부 방해되니까 참으려고.
언니는 학원에 먼저 와도 내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기다리면서도 상큼한 미소는 항상 유지되어 피아노 소리가 멎으면 문을 열며 다 끝났어? 말하는데, 그 미소를 보며 나도 모르게 웃음기가 돌았다. 시내 길가에 단정하게 자리 잡은 언니네 집까지는 걸어서 금방이었다. 저녁을 먹고 가라고 손을 잡아 끌 때가 많았지만 못 이기는 척 몇 번을 제외하곤 그냥 언니랑 걷는 것이 더 좋았다. 언니 집을 지나 숙소로 가야 했기에, 언니는 가끔 중간까지 바래다주었다.
길가의 언니 집에서 언니의 방은 길 쪽으로 나 있었다. 작은 창문도 있어 남자 친구가 왔다는 신호를 보내는 목소리도 잘 들릴 것 같았다. 시내를 오고 갈 때도 언니 집 앞을 지나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담은 없는 집이지만 집과 도로 사이에 인도가 있어, 사람들이 오고 감이 많은 장이 서는 날 빼고는 낮 동안 집 앞 풍경이 고요했다. 간혹 광산에서 채석된 원료를 실어 나르는 덤프트럭이 지나갈 때가 있지만 가옥 주변은 방지턱이 있어 제한 속도로 느리게 달렸다.
언니는 자신의 방이 길가에 있는 것이 싫다고 했다. 집 구조상 창가 쪽에 침대를 놓고 잠이 드는데 가끔 꿈속에서 어두운 밤 길을 헤매는 차량이 자신의 집으로 돌진하는 꿈은 꾼다고 했다. 만개한 봄꽃처럼 싱그러움을 지닌 언니가 겨울정원이나 있을 법한 차디찬 불안한 생각을 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곧 사랑이 결실을 맺어 이곳을 떠날 채비를 하는 언니에게 머물던 방이 보내는 애틋함일 거라고 위로했다.
길가 언니 집 앞에서 꼭 잡고 있던 언니 손을 놓았다. 평소 같은 헤어짐이었다. 내가 숙소까지 혼자 가는 것도 마음 쓰여 한참을 내 뒷모습을 지켜보는 윤희 언니! 다시 언니 손을 잡게 되었을 때, 더 이상 이 세상에는 언니의 온기가 남아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