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지만 다른 길 다르지만 같은 길
나는 그때 무엇을 깨달았던 걸까?
5년 전, 불교 명상과 상담을 공부하면서 나는 불교에 무지한 채 수업에 임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나 혼자만의 깨달음을 얻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것이 불교의 진리였는지, 수련의 내용이었는지, 해탈의 마지막 과정을 가리키는 말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사람의 기억은 언제나 변형되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지금 내가 쓰려는 이야기는 불교 교리라기보다는, 불교라는 매개를 통해 내가 혼자 도달한 깨달음이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때의 깨달음은 이러했다. 우리의 마음, 정신의 마음을 온전히 비워낸다면, 공(空)은 결국 충만(滿)을 이룬다. 이러한 상태가 열반이고 해탈이라 생각했고, 나는 “비워냄과 가득 참은 다르지 않구나”라는 결론에 뿌듯했다. 하지만 지금은 잘 모르겠다. 비어있음과 충만함은 함께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그때 무엇을 깨달았던 걸까?
나는 같은 길을 걷고자 했다.
돌아보면 학업은 내게 큰 성취보다 행운과 선물에 가까웠다. 학창 시절의 공부는 내게 우정을 주었고, 대학의 공부는 꿈을 꾸게 했다. 대학원의 공부는 고민을 안겨주었다. 지금까지 상담을 공부하는 이유도 사실은 누군가에게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나는 그저 나를 알고 싶었고, 평안을 얻고 싶었기 때문에 이 길을 걸어왔다.
긍정심리학, 인본주의 심리학, 수많은 상담 관련 책 속의 말들은 내게 진리처럼 다가왔다. 그것들은 마치 수련자가 공(空)을 실천하는 것처럼, 부정적 감정을 비워내도록 돕는 말들이었다. 그런데 그날의 깨달음은 내 안에 균열을 만들었다. 비어있음이 충만을 낳는다면, 충만 역시 비어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슬픔·아픔·고통이 가득 차는 순간, 우리는 그 속에서 오히려 공허와 비움을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
여러분은 이 오만해 보이는 생각에 어떻게 느껴지나요?
달라보이는 길이 같은 종착지를 데려다 준다.
이상하게도, 마치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에 나온 말처럼, 내가 진심으로 소망한 것들은 실제로 내 삶에 스며들곤 했다. 나는 상담학을 공부했고, 마음을 다루는 일을 업으로 삼았지만, 결국 한낱 인간이었기에 비워냄보다는 채움을 선택했고 그 안에서 허우적거렸다. 어쩌면 지금도 나는 여전히 충만 속에 갇혀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부정적인 충만은 나를 다른 방식으로 이끌었다. 왜 우리는 슬픔에는 다양한 이름을 붙이고 해석하며 다루려 하지만, 행복에는 부정적인 이름을 붙이지 않을까? 돌아보면 내 인생의 슬픔들은 비워진 채로 남지 않았다. 오히려 슬픔이라는 바다가 나를 가득 채울 때, 그 순간 가장 비워진 나를 만나기도 했다.
결국 비운다는 것과 채운다는 것, 양극에 서 있는 듯한 두 단어는 어쩌면 가장 닮아 있는 말일지도 모른다.
슬픔 속에 온전히 채워진 나는, 그 순간 가장 맑고 깨끗한 나를 만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다시, 세상이 말하는 방식이 아닌 내 방식으로 채워가는 길을 걸어가고 있다.
다르지만 같은 우리 같지만 다른 우리
나는 여전히 비워내기도 하고, 다시 가득 채우며 살아간다. 때로는 이 방법이 진리라며 웃고, 때로는 세상과 어긋난 길 위에 서기도 한다. 하지만 비워내든 채우든, 나만의 길이든 모두의 길이든, 결국 발걸음은 하나의 끝으로 이어질 뿐이다.
그날 내가 얻은 깨달음은, 다르면서도 같고 같으면서도 다르다는 아주 작은 앎이었다. 충만과 공이 서로를 비추듯, 모든 길 또한 그렇게 서로를 닮아 있었다.
오늘도 나는 여전히, 세상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