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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잘안 Oct 20. 2021

엄마,나 천국에 빨리 가고 싶어요

삼남매의 둘째란?

둘째가 7살이 되던 해였다.

위로는 3살 터울의 형, 아래로는 5살 어린 여동생의 중간에 끼인 둘째는 보드라운 솜사탕처럼 달콤한 아이였다. 순하고 차분하여, 어딜가든 사랑을 받았고, 귀여운 외모 덕분에 사탕 하나쯤은 거뜬히 더 받아내던 우리집 보물이었다.


7살의 어느 가을날, 조용한 목소리로 아들이 속삭였다.

"엄마, 나 천국에 빨리 가고 싶어요"

"응? 천국? 그래~~좋지~엄마도 천국에 가고 싶다~"


태어날 때부터 교회를 다녔고, 4살부터 교회에 소속된 유치원에 다니고 있었기에, '천국'이라는 단어를 쉽게 꺼냈던 아이의 모습을 아무런 의심없이 받아들였다.

아들은 거의 매일마다, 아니 하루에도 몇 번씩 그런 말들을 내 곁으로 다가와 조용히 뱉아냈다.


12월 찬바람이 외투를 파고들 무렵, 그 날도 어김없이 '천국에 가고 싶다'는 아들의 말이 들려왔다.

"아들~ 왜 그렇게 천국에 빨리 가고 싶은대?"

"음.......그냥 거기 가면, 좋을 것 같아...."

항상 똑같은 대답이었지만, 그 날따라 아이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았다.

이제 갓 돌을 지난 막내와, 에너지 넘치는 첫째 아들의 사고들을 수습하느라, 온순한 둘째 아들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그럼 엄마랑 같이 이야기해보자."

저녁을 하던 것도 미뤄두고, 막내를 첫째에게 맡긴 후, 단 둘이 안방으로 들어가 앉았다.

아들은 입을 툭 튀어 내밀고, 그저 바닥만 응시했다.

요즘 힘든 일이 있는지, 친구와 다툰건지, 유치원이 재미없는지, 사고 싶은게 있는지 물어봤지만,

아들은 묵묵부답이었다.


첫째 아들이 8살때, 모래놀이 수업을 한 적이 있었다.

다소 공격적이고, 감정이 뾰족했던 첫째 아들이 버거웠던 나는, 지인의 도움을 받아 상담센터를 찾았었고, 4주만에 아이가 원하는 것은 오직 '사랑'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경험이 있었다. 내가 사랑을 주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이에게 표현을 제대로 해주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둘째 아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 때 첫째의 상황이 떠올랐다.

외향적인 첫째는 불만을 표출해냈었고, 둘째는 무언가 속으로 앓고 있다는 것이 그제야 느껴졌다.

결국, 남편과 상의 끝에 가족상담센터를 찾기로 했다.


몇 주를 기다려 온 가족의 상담이 있던 날.

상담실에 들어서면서부터 눈물이 흘렀다. 왜 꼭 상담선생님은 그런 얼굴로 사람을 바라보시는지....

첫째,둘째에게 몇 가지 테스트를 하고, 부모도 설문지를 작성한 후, 결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둘째는 우울증이었다.



들어설 때 흘렸던 눈물이, 폭포수가 되었고, 손수건으로 입을 막아도 멈출 수가 없었다.

언제나 온화하고, 사랑스러운 포근한 아들이....우리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든든한 보물같은 아들이....왜 우울증이라는 것인지...

첫째의 말썽으로 힘들 때보다 몇 백배의 강한 충격으로, 나는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둘째 아들, 많이 이뻐하시죠? 아이도 엄마가 너무 사랑하는 걸 알아요....하지만, 아들이 그 사랑을 무거워해요....형때문에 울던 모습, 동생때문에 지쳐있던 모습, 아빠랑 다투고 외로운 모습...엄마의 모든 순간을 함께 느끼다보니, 아이가 자기를 너무 억눌렀어요.....엄마를 웃게 하고 싶어서, 계속 참고 참고 참았나봐요..."


선생님의 담담한 설명이 이어지고, 그 한 마디 한 마디에 내 뼈도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첫째의 일로 사람들과 다투면, 난 둘째 아들의 손을 잡고 '엄마가 오늘 좀 힘들었네'라고 기대었다.

세 아이의 독박 육아로 힘들어 남편과 다투면, 둘째 아들의 손을 잡고 '아들, 엄마랑 여행가자'며 집을 나서곤 했다.

그것은 내가 상한 마음이 너때문은 아니라는 위로였고, 너라도 나와 함께 있어주라는 간구였고, 유순한 아들에게 기대어 쉬고 싶은 나의 연약함이었다.


선생님은 이 상황들을 들으시며 같이 울어주셨다.

"엄마가 얼마나 힘든지 알아요....아이는 엄마의 마음을 너무 공감해서, 그래서 조금 아픈거에요"
아직 어리고,심각한 중증이 아니기에 큰 치료적인 방법을 권하지 않으신다며, 아이에게 환기된 모습을 조금씩 보여줄 수 있도록 노력하자고 하셨다. 혼자서 어려우면 다시 오라는 따뜻한 위로를 남기셨다.


집으로 돌아와 둘째 아들이 상담센터에서 그린 가족 그림을 보았다.

스케치북 종이 위에 손가락만한 사람들이 모두 떨어져서 5명이 가만히 서 있었다.

얼굴 표정도 없고, 귀도 없었다.

아들의 그림을 한참동안 바라보며, 울고 또 울었다.




지금 둘째 아들은 10살이 되었다.

여전히 차분하고 온화한 성품의 아들이지만, 제법 목소리 큰 남자로 자라고 있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감성적이란 것을 그 때 알게 되었고, 그 덕분에 미술쪽으로 소질이 있음도 보게 되었다. 요즘은 그림을 그리며 에너지를 발산하고, 작은 성취감들을 쌓아가고 있다.


7살, 상담센터의 상담이 있은 후, 첫째에 이어 둘째까지 문제가 있는건가 하는 마음에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쓰러져 있다, 불현듯 나만의 대나무 숲인 '기도'가 떠올랐다.

'제발, 둘째에게 필요하다면 상담 신청이 되게 하시고, 아니라면 꼭 필요한 누군가에게 기회를 돌려주세요'


기도인지, 뽑기 주문인지도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학교에 선생님의 상담 동의서를 구하고 , 동사무소로 정서바우처라는 것을 신청했다. 상담비가 1회당 10만원을 하였기에, 세 아이를 키우는 월급쟁이 집에서 비용을 감당하긴 어려웠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담임선생님의 동의서를 받고 다자녀 혜택을 받으면, 거의 100% 나라에서 바우처 제도로 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셨기에, 신청을 앞두고 짧은 기도를 한 것이었다.


몇 주 후, 결과가 도착했고, 우리는 감사하게도 '탈락'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나의 부족한 생각과 경험으로 결정하지 못할 때,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결정되어진 상황이 오히려 속이 시원했다.


'좋다! 우리 둘째는 상담센터의 도움이 필요없을만큼 간단한 문제구나. 힘을 내서, 아이를 내가 도와주자.'


깔끔한 결론 앞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주저앉았던 자리를 털고 있어났다. 아이를 안아주고 기다려주고 쓰다듬어 주려고 무던히 애썼다.


더 이상 아이 앞에서, 다른 상황들의 괴로움을 토로하지 않았고, 좁은 아이의 어깨에 기대려 하지 않았다.

아이가 오히려 어떤 상황앞에 주눅들고 부딪히면, '사람이니깐 그럴 수 있어'라는 말로 품어주었다.


아이는 서서히, 느리게 변화되어 갔다.

친구들을 쉽게 사귀지 못해 늘 혼자였던 학교생활도, 이젠 편하게 아이들과 어울리며 지내고 있다.

덩치만 컸지 영 부실해보이던 엄마가, 자신이 앉아 쉴 수 있는 그루터기라는 것을 조금씩 느끼며, 더 이상 이 곳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사라져간 듯 했다.


'엄마'라는 그루터기.

튼튼한 뿌리로 땅을 붙들고 버티듯, 마음의 중심을 붙들고 인생 풍파를 견뎌내어야 아이들의 쉴 곳이 될 수 있나보다. 아이가 스스로 자신을 지켜낼 수 있을 때까지, 최후의 한 방울의 사랑까지도 흘려보내고 싶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마지막 그루터기 사랑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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