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병원을 찾았을 때 석희는 의사의 질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입이 열리기 전 쏟아지는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입술을 덮어 버렸다. 같은 자세로 앉아 얼마의 시간을 흘려보냈는지 모른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 얼핏 보면 누가 환자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창백한 얼굴에 약간 구겨진 가운을 입고 있던 중년의 의사 역시 눈물을 닦을 수 있도록 화장지를 건네줄 뿐.그 어떤 위로의 말도 없었다.화장지를 건네는 의사의 행동에 더 북받치는 울음의 이유가 뭔지 석희는 알 수 없다.
한참을 울다 창피함이 몰려와 눈물은 닦아내었지만 고개를 들지 못한다.석희가 '네'라고 대답할 수 있었던 의사의 질문은 "다음 주에 또 오세요. 간호사가예약 잡아 드릴 거예요" 뿐이었다.
'정신건강의학과'
일 육아 살림 그리고 채무에 지쳐가던 석희는 말이 점점 줄어들고 살이 말라가며 생기를 잃고 있었다.
면접당시 '가족 같은 분위기'를 강조하는 담당자의 말이 무엇을 뜻하고 있는지 매일매일 실감하고 있다. 그 분위기란 서로의 업무가 정확히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서로 가족처럼 돕는다는 허울마래 일감 몰아주기를 정당화하고 있을 뿐이었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되기도 했지만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설 엄두가 나지 않아 석희에게 넘겨져 오는 일들을 거절하지 못하는날이 부지기수였다.
가족이란, 그 의미가 사뭇 다를지라도 석희가 느끼는 불편함은 집에서건 사회에서건 참 한결같다.
'망할. 이 가(?) 같은 분위기'
이러한 이유로 퇴근이 늦어지는 날이 많아 예서는 항상 어린이집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다. 복도 양쪽으로 늘어서 있는 교실의 불은 모두 꺼 놓아서 예서가 있는 방의 불이 상대적으로 더 밝게 느껴진다. 어두운 복도 끝 교실에서 "엄마" 하고 달려 나오는 예서를 보면 마음 한편이 저린다.
예서는 어떤 날은 웃으면서 어떤 날은 울면서 또 다른 어떤 날은 기쁨도 슬픔도 없는 표정으로 석희에게 다가온다.그런 예서를 보며 석희는 입술을 다물어 울음을 참아낸다. 무릎을 꿇고 앉아 꽉 끌어 안아 볼에 연신 입을 맞춘다.'너무 늦게 오셨어요'라고 말하는 것 같은 선생님의 눈초리를 애써 무시하고, 예서를 업고 어린이집 문을 나서며 긴 한숨을 내쉰다. 업혀 있는 예서의 몸이 석희의 등을 어루만져 주는 듯하다. 포근하다.
일하는 엄마가 석희 혼자이진 않겠지만 석희는 약해질 대로 약해진 맘을 추스리기가 힘들다. 원망이 석희 마음속에서 희망을 밀어내고 있었다. 어린이집에서 저녁을 먹은 예서를씻기기만 하면 되었다. 빨리 잠들어 주면 좋으련만 그렇지 않은 날엔 석희는 예서에게도 화를 참지 못 한다.안쓰러운 마음은 온데간데없다.
그러고는 잠든 예서를 바라보며 미안함에 매일 눈물 바람이다. 석희 스스로를 질책한다. 이런 악순환이 점점 석희의 마음을 메마르게 한다.
진혁은 석희보다 퇴근이 더 늦다. 그를맞이하는 석희의 눈시울은 매일 붉게 물들어 있다.
진혁이 보는 석희의 모습은 어제, 그제, 열흘 전 언제나 같다. 저대로 두면 안 될 것 같았다. 석희의 의중은 중요하지 않았다.내일은 연차를 쓰고 석희를 꼭 데리고 가겠다고 마음먹고퇴근했다.
오늘도 집안의 분위기는 어제와 다르지 않다.
방 한쪽에 상을 펴 놓고 작은 전자제품 부업을 하고 앉아 있는 석희의 모습은 애처로운 마음이 아니라 한숨을 끌어내고 있다
"석희야. 너 내일 나랑 병원 좀 가자 내가 예약해 놨어"
한 동안 석희를 지켜만 보던 진혁이 사전에 어떤 말도 없이 병원 예약을했다고 한다.
"싫어"
듣기 싫다는 듯 단호하게 말하고 예서가 깰까 싶어 일어나 방을 나가는 석희를 진혁이 따라 나간다.
화가 난 진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준비해 놓은 말들을 늘어놓는다.
"그럼 당분간 내가 예서 데리고 본가로 들어갈게. 니 상태가 이렇게 불안한데 예서 돌보기 힘들 거 아냐? 나도 너 보기 힘들어. 결정은 네가 해. 예서 없이 혼자 이렇게 살던가. 아님 도움을 받던가"
"웃기는 소리 하지 마. 그러기만 해 봐."
석희는 공격적으로 대답한다.
"예서 생각해서 나랑 내일 병원 가자"
"......"
불안증이 우울증으로 또 그 우울증이 다시 공황장애로 변해갔다. 자신의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었던 고통의 시간들이었다.
어쩌면 약의 도움이라도 받고자 하는 무의식이 스스로를 더 깊고 어두운 곳으로 몰아넣어 가두는 시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석희 마음의 일탈과 육체의 쇠퇴와는 상관없이 하루하루는 차곡차곡 쌓여갔다.
석영도 안정적으로 직장 생활을 하고 있고. 아빠도 완치 판정을 받으셨다. 나이가 있으시니 여기저기 아픈 거야 어쩔 수 없었다. 엄마 또한 아빠와는 못 살겠다면서도 여전히 아빠와 살고 있다.한 순간에 모든 걸 잃었던 부부는 서로를 잃지 않기 위해 애쓰는 듯 보였다. 아빠는 엄마가 한 실수를 보듬었고. 엄마는 아빠의 변덕을 인내하고 있다.
진혁의 회사도 안정을 찾아 적은 금액이지만 꼬박꼬박 월급이 나오고 있어 세 식구 사는 것엔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돈 많이 벌어 잘 먹고 잘 사는 게 목표가 아니었다. 아무 일 없이 사는 게 목표였다.
이제 갚아야 할 빚도 끝이보인다.
석희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보리라 다짐했다.
진혁과 예서만 바라보기로 했다. 그 첫 시작은 이 지긋지긋한 13평 집을 떠나보내는 것이었다. 풍수지리를믿는 건 아니지만 이 집이 모든 일의 원흉인 것 같아 더 이상 머물고 싶지 않았다. 이곳에선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없었다. 아니 싫었다.구석구석 들어앉아 있는 모든 추억이 즐겁지 않다. 딱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6개월마다 빨간색 볼펜으로 표시해 놓은 예서의 키의 변화를 이 집 벽에 남겨두고 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6개월 68cm. 12개월 76cm. 18개월 82cm......
친정 식구와 어느 정도 떨어진 곳으로 이사하기로 했다. 집을 사서 갈 형편은 안 되니 전세를 알아보았다. 매매로 갈 집이 아니었으므로 선택에 어려움은 없었다. 집을 판 금액에 맞추기만 하면 되었다. 엄마 아빠를 이모처럼 안 보고 살 자신은 없었지만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떨어져 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24평 전셋집
방 3개, 욕실 하나. 주방과 거실을 구분하기가 참 애매한 넓이이다. 방 3개 중 하나는 미닫이 문으로 되어있어 문을 열어놓으면 거실이 확장되는 구조다. 미닫이 문을 모두 떼어 넓은 거실로 사용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