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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연 Aug 08. 2024

시금치 '시'자도 싫다고?

왜?

휴대폰 진동소리가 울린다. 요란한 빗소리에 묻혀 처음엔 몰랐다.

시아버님 전화다. 남편이 받는다.

"네, 이따 저녁 늦게 갈게요"

하며 끊는다.

"다 늦은 저녁에 시댁에 간다고? 왜? 무슨 일?"

"옥수수 땄다고 빨리 가져가서 먹으래"

옥수수의 계절이 왔다.

시댁 텃밭에서 자라는 옥수수는 대부분이 내 뱃속으로 들어간다.

큰 며느리는 옥수수 귀신인 거다.




시 부모님은 여름이면 옥수수, 청양고추, 입맛 없을 때 먹으면

기운 나는 짠맛의 오이지를 항상 챙겨 놓으시곤 언제든 먹을 수 있게 해 주신다.

생각만 해도 어금니 안쪽으로 침이 고이는 달고, 맵고, 짠 계절 음식들이다.

거절하지 않고 남편에게 얼른 가자 한다.




시댁 가는 길에 보이는 시골길은 날씨와 계절에 따라 그 풍경이 다르다.

비 오는 오늘 오후 하늘은 잔뜩 무겁다.

물먹은 짙은 회색 구름이 그 무게와 비례하는

빠른 속도로 바람에 떠 밀려간다.

벼 알이 영글지 않은 초록의 벼는 '사락'소리를 내며 반쯤 누워 넘실거리고,

논과 도로를 구분해 주는 담처럼 높이자란 나무의 잎은 바람에 흔들리며 

평소에 보여주지 않던 연두의 속살을 살짝 보여주곤 짙은 초록뒤로 다시 숨는다.

차창을 여니 방금 베어놓은 물먹은 비릿한 풀향기가 바람을 타고 코끝에 머문다. 

젖은 흙냄새와 함께.

습을 잔뜩 먹은 후덥지근한 바람이  얇은 천인 듯 얼굴을 덮는다.

순간 숨이 훅 막힌다.

제 것이 아닌 기둥을 타고 올라가 흐드러진 능소화를 떠오르게 하는

몸뻬 바지를 입은 허리 굽은 할미가 뒷짐을 지고 버겁게 바람을 이기며 천천히 걷는다.




한 시간 정도의 풍경 감상을 끝내고,

시댁 너른 마당에 주차한다.

내리자마자 어머님께 외친다.

"엄마, 옥수수 어디 있어요? 껍질 벗기게 주세요. 창고에 있어요?"

"벗길게 어디 있어. 다 벗겨서 삶아 놓았으니까 가서 냉동실에 넣기나 해"

귀찮다는 듯 퉁명스러운 그 말씀에 애정이 잔뜩 묻어있다.

"제가 가지고 가서 해도 되는데, 힘드신데 뭣하러 그러셨어요?"

좋아서 웃으면서도 죄송스러워 애교 섞인 콧소리를 내며 말한다.


어둑해진 밭에서 며칠 먹을 풋고추와 호박잎, 상추를 대충 쓸듯이 따서 담고

오골계가 낳은 초란 한판과 오이지를 챙겨 차에 싣는다.

"오늘은 늦었으니 그냥 가고 담주에 다시 와, 냉장고 청소해야 해"

어머님이 말씀하시는 냉장고 청소는

'너희들 먹으라고 아버지가 사다 놓으신 거 많다. 그러니 와서 챙겨가'

이런 뜻이 담겨 있다. 경험으로 터득한 어머님의 화법이다

"네, 담주는 일 때문에 못 올 것 같고요. 그 담주에 올게요. 주신 음식 잘 먹을게요"

인사드리고 차에 오르자마자 옥수수 한 자루를 손에 쥔다.

이 여름 장마가 끝나면 나에게 옥수수 살이 얼마나 붙어 있을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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