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곤의 정체성
“피곤해 보이십니다.”
담당의사의 첫마디를 들으니 무슨 답을 해야 할지 좀 허탈해졌다.
본인 처방으로 오래도록 수면제 복용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피곤해 보인다 니.
피곤하지.
육체와 정신의 자율적 리듬으로 잠드는 게 아닌 내 상태에서 안 피곤하면 이상한 거 아닌가.
“ 네. 약을 먹고 잠이 들어도 중간에 깨고 그러네요. ”
결론은 딱히 다른 것으로 처방할 만한 선택여지는 별로 없다는 이야기다.
답이 없다.
그렇다고 억지로 버텨본다 해도 달리 좋아지는 것도 없고.
일 때문에 날을 꼬박 새워서 몸도 정신도 피곤한 상태에서도 잠이 안 오는 걸 어쩌란 말인가.
주말에 어떻게든 몸을 쥐어짜서 운동을 좀 힘들게 해 놔도 그저 피곤할 뿐 잠은 안드로메다로 날아가 버렸는데.
내 나이에 약에 의존을 해서 나쁜 것보다 잠을 못 자는 것이 더 나쁘니 일단 약을 먹어야 한다는 논리는 이해한다.
그런데.
정말 별의별 약이 다 나오고 곧 암치료제도 나온다고도 하고,
인류를 화성에 보낸다 만다 과학의 발전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데도 잠을 쉽게 자게 만드는 약은 아직도 나오지 않는 걸 보면 불면이 어렵긴 한가 보다.
빼앗긴 숙면에도 잠은 올 수 있을까.
어둠 속에서 눈을 감고 양을 헤아리면 스르르 잠이 오는 시절이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이제는 불면이 몸에 익숙해져서 이따금 소파에서 꾸벅 졸음이 오는 상황들이 오히려 신기할 지경이다.
제대로 침대에만 누우면 천리 밖으로 도망치는 잠인데.
어찌하나.
삶에 걸린 모든 걸 내려놓으면 이 불면이 없어질까.
다 내려놓고 티브이에 나오는 자연인들처럼 깊은 산속이라도 들어가면 나아질까.
그땐 또 다른 생각들이 비어져 나와 잠을 멀찌감치 내쫓겠지.
어렵다.
알약 몇 알에 의존하여 하루하루를 지내는 잠이란.
최면술이라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렇게 되고 싶다.
영화 올드보이의 마지막 장면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