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싱구라미를 용궁으로 보내며
키운다는 것은 슬픔을 전제로 한다
한 때 이런저런 이유로 열대어에 빠져 어항을 열 개까지 늘린 적이 있었다.
오래전 이야기 이긴 하지만.
화려한 난주, 구피, 에인절피시, 도둑게, ‘투어’라 불리는 베타도 브리딩- 새끼를 키워서 나눠주는 것- 까지, 심지어 냉수어종 민물고기까지 키워보았다.
그러다 보니 주말은 종일 물갈이 하는데 시간을 다 보내는 루틴이 있었다.
퇴근하고 수조 안에서 한가로이 – 그들은 결코 한가하진 않았겠으나 – 헤엄치는 물고기들을 보면서 ‘물멍’을 하다 보면 복잡한 생각들이 힐링되는 것 같아서 좋았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 아픈 일들을 겪게 되었다.
물고기들은 대체로 수명이 짧은 편이기도 하고,
어지간히 물관리를 한다고 해도 소위 ‘물생활’ 한다는 사람들의 용어로 ‘물폭탄’을 맞아서 수조의 PH농도가 급변하면 죽는 개체들이 생기는 것이다.
물론 좀 강인한 아이들은 견디고, 약한 개체들이 죽는 것이지만,
아침에 일어나서 자주 죽은 물고기들을 건져내는 행위는 결코 쉽게 적응이 되지 않는 것이다.
아침부터 ‘죽음’을 마주하는 일들은 마음이 무거워지는 일이다.
그래서 물생활을 하는 카페에 공지를 올려 모든 어항들을 타인들에게 넘겼다.
죽어가는 물고기들을 바라보는 반복을 견디기 어려워서였다.
그나마 사무실에 있는 어항은 그대로 두게 되었는데, 거기서 잘 지내던 키싱 구라미 한 마리가 둥둥 떠있는 것을 출근해서 마주했다.
다시 또 무거운 마음으로 죽은 물고기를 건져내고, 이제 남은 키싱구라미들이 모두 용궁으로 떠나면 다시는 물고기를 키우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고양이를 무척 좋아하지만 인간보다 짧은 수명인 고양이를 키우고 싶지 않은 이유도 다르지 않다.
살아있는 생명을 키우고 돌본다는 것은 그 생명의 죽음까지를 받아들이고 생명의 무게를 짊어지는 것이다.
나는 아직은 그럴 정도의 마음준비는 덜 되어있지 싶다.
서로 교류가 되지 않는 열대어에게 조차도 무거워지는 그들의 생로병사를,
서로 접촉하고 유대감을 가지는 따스한 온혈동물에게서 마주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은, 생로병사를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때로는 추모하며 보내는 것이 당연하겠고,
그것이 무언가를 키우고 기르는 자가 당연하게 치러야 할 일련의 과정일 테지만,
나는 아직은 그 정도로 성숙한 인간은 못 되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