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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비 Dec 12. 2023

일기 쓰는 것을 깜빡했다. 너무 평온한 하루라서

2023.12.12.


‘학교 가기 싫다.’, ‘요즘 애들은….’, ‘스트레스받는다.’, ‘힘들다.’ 학교로 출근하기 전, 퇴근한 후, 습관처럼 툭툭 던지는 말들이다. 한 교사는 열의 없는 직장인이 되어 밀려드는 업무와 곤란한 학생을 마주하며 괴롭다, 못 해 먹겠다, 입 밖으로 내뱉는다. 이 교사의 말에는 가시가 있어 학교가 괴로운 공간이길, 교사가 고단한 직업이길, 자신이 그런 진흙탕 속에 허우적대고 있길, 바라는 것 같다.


누군가가 한 교사에게 말했다. ‘뉴스 보니까 요즘 애들 아주 건방지고 못됐던데요. 교사하기 너무 힘들겠어요. 애들은 역시 때려가며 키워야 하는 건데.’ 그제야 그 교사가 깜짝 놀랐다. 요즘 애들, 그렇게 못되기만 한 건 아니에요. 교권이 추락했다고, 그래도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에요. 학교는, 뉴스에 나온 것처럼 삭막하고 전쟁 같은 곳만이 아니라 따뜻하고 사랑이 넘치는 곳이기도 해요.


글을 써야겠다. 다정하고 온화한 학교의 일상을 글로 공유해야겠다. 무심코 놓쳤던 고마움을 일기로 남겨야겠다. 뉴스에서는 학교의 따뜻함을 알려주지 않으니까. 습관처럼 힘들다는 말을 던지는 교사는 사실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알지 못하니까.


30대_고등학교_비담임_교무기획부



어제는 일기 쓰는 것을 깜빡했다. 월, 화, 수, 목, 금에 학교 일기를 연재하기로 약속했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사실 일기를 쓸 만큼 특별하게 기억나는 일이 없었다. 출근 시간에 출근하고, 시험이 어려웠다는 학생들의 핀잔을 몇 마디 듣고, 선생님과 이번 시험에 관해서 몇 마디 수다를 떨고, 시험 기간에 밀린 일을 처리하고, 퇴근 시간에 퇴근했다. 그게 끝이었다.


실은 오늘도 그랬다. 1교시에는 동 교과(생물) 선생님과 함께 서술형 답안지 채점을 논의했다. 맞다고 해야 할지, 틀리다고 해야 할지 애매한 학생의 답들을 모아 어떻게 채점할지 이야기하는 일이다. 생각보다 논의가 일찍 끝났다. 논의를 끝낸 김에 식탁 위에 놓인 수제 쿠키 하나를 얻어갔다. 2교시에는 수업이 있어 학생들과 점수 확인을 했다. 학생들에게 시험 점수를 알려주고, 잘못된 부분이 있는지 확인하는 일이다. 엄청 똑똑하지는 않지만 언제나 열심히 하는 학생이 한 명 있는데, 그 학생의 점수가 크게 올라서 기분이 좋았다. 한 학생은 시험이 너무 어려운 나머지 나에게 삐져 버렸다. 내가 인사를 해도 눈을 흘기며 입을 삐죽였다. 또 어떤 학생은 몹시 화난 표정으로 점수를 말없이 확인하고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표정은 화나 보였는데, 눈은 울 것 같아 보였다. 마음은 이해하지만,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라 안타깝다. 구구절절 얘기하면 끝도 없지만, 오늘의 하루는 아무튼 이랬다. 언제든, 어느 학교에서든 일어나는 지극히 평범하고 평온한 하루였다.


이 평온한 하루의 가치를 종종 잊을 때가 있다. 기억에 남는 즐거운 일이 없어서, 지루하고 재미없는 학교 생활을 하고 있다고 착각할 때가 있다. 그런데 사실, 이 평온한 하루의 일과가 설레고 즐거운 일이 가득한 하루만큼이나 소중하다. 불교에서 '고(苦)의 반대말은 즐거움이 아니라 평온한 상태'라고 얘기하지 않았나. 평온함이란 어쩌면 즐거움보다 더 값진 것일지도 모른다. 마음이 너무 뜨지도, 가라앉지도 않는 고요한 상태. 다양한 학생들이 뛰어다니는 학교에서 이 고요를 누리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나는 그 소중한 고요를 이틀이나 누렸다. 그러니 어찌 보면 어제와 오늘이 내 학교 생활의 황금기인 셈이다.


시험 후 채점 기간에 이렇게 고요할 수 있는 것은 학생들이 채점 결과에 크게 이의를 제기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사실 솔직한 마음으로, 학생들이 자신의 채점 결과에 이의를 가졌으면 좋겠다. 정확하게는 이의를 꼭 가졌으면 좋겠다기보다, 학생들이 자신의 답안이 왜 이렇게 채점되었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채점 결과를 떠나서, 학생들이 학업에 열정을 좀 가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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