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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처돌이 Jun 10. 2021

-36kg을 빼며 얻고 잃은 것: 싫지 않은 참견

탄수화물 중독자의 다이어트 이야기


다이어트는 필연적으로 외로운 행동이다. 그동안 유지해온 식습관과 행동 반경을 바꾸다보면 자연스럽게 사람과의 만남은 줄어들고 나 홀로 남아 도시락을 먹거나 외식을 피하게 된다. 게다가 만사가 힘드니 사람을 만날 에너지도 없다. 슬프지만 다이어터의 숙명이니 받아들이는게 편하다.


하지만 다이어트 중에도 만남은 있다. 나는 여러차례 썼듯 소규모 운동짐에 다녔는데, 그곳에서 만난 분들은 내가 여태껏 살면서 처음 만나는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기혼자에 초중고생 자녀들을 키우는 분들 말이다. 나와는 나이차이가 많게는 30년까지 나시는 분들을 사회에서 만날 일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나는 이분들 사이에서도 단연 처지는 체력과 운동실력으로 매번 애를 먹었다. 그간 운동을 하지 않아서 몰랐지만, 여러 운동을 꾸준히 섭렵한 내 친구는 그런 분들이야말로 진정한 고수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어느 운동시설에나 그런 은둔고수들이 존재하며 구분 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현란한 운동복과 호탕한 웃음소리, 남다른 자세 등등이 있다. 과연 친구의 말대로 그분들은 다이어트 짐에 다니는 이유조차 비범했다.


'필라테스 만으로는 운동이 부족해서'

'단시간이다보니 하루에 운동 2개를 하기 편해서'

'오전에 가볍게 헬스장 갔다가 여기 와서 진짜로 몸 푸는거지'


상상도 못한 대답이었다. 하루에 끽해야 한시간 운동하는 나는 온갖 근육통과 고통에 시달리며 갓 태어난 사슴처럼 계단을 벌벌 떨면서 내려가는데, 그분들은 깔깔거리시며 아무렇지도 않게 조깅으로 자택까지 귀가하셨다. 운동짐의 천정에 붙어있던 철봉으로 턱걸이나 로잉머신도 슥슥 하셨다. 나는 매달리기조차 눈앞이 아득해졌는데... 진정한 생활체육인을 처음 만난 나는 이윽고 그분들의 포스에 압도되었다.


2개월 정도 지켜본 결과, 유난히 화려하고 과감한 운동복과 신발, 탄탄한 팔뚝과 마른 체격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는 태릉 선수촌이 따로 없었다.  당시 운동 짐에서는 차례로 스쿼트를 하는 미니 게임을 종종 했다. 한명씩 순번을 돌며 스쿼트를 하는데 점점 횟수가 늘어나는 식이었다. 10번이 넘어가자 나는 급격히 속도가 떨어졌다. 그런데 그분들은 20번까지도 너무나 평온한 얼굴과 완벽한 자세로 스쿼트를 마무리 하시는게 아닌가. 어설픈 젊은이는 따라가지도 못할 고수의 품격이었다.


나중에 편하게 대화를 나누게 된 그분들은 알고보니 처음부터 나를 예의주시하고 계셨다. 아무래도 운동짐의 회원이 그다지 많지 않고 매번 죽상으로 운동을 하는 몸치의 몸부림은 시선이 갈 수 밖에 없겠지 싶었다. 그분들의 대화 주제는 대중 없었다. 자식 이야기에서 운동, 해외 여행까지 다양했다. 사실 나이차가 나다보니 대화에 끼진 못했고 주로 운동중에 어느 운동화가 더 좋다느니 물병은 이게 편하다느니 하는 훈수를 어설프게 받는 식이었다. 당시 나는 상당한 우울감과 외로움에 젖어 있었기에 그런 충고조차 명랑하고 살갑게 대꾸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늘 일정한 시간에 모여 운동하시는 정다운 모습이 내심 부럽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인바디를 재고 꽤 빠진 체중에 홀로 고무되어 희희낙락하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등 뒤에서 불쑥 말을 건네서 나는 깜짝 놀랐다.


'많이 빠졌어요?'

'아, 네.'

'맞지? 내가 보기에도 살이 정말 많이 빠졌어! 대단해!'


얼떨떨한 나를 보며 회원 여럿이 둘러싸고 대단하다며 살갑게 말을 붙였다. 고강도 운동짐이다보니 한두달 하고 그만 두는 사람이 정말 많은데 몇개월간 꾸준히 나오는 모습이 보기 좋다며 마구 칭찬했다. 그러더니 내 운동복을 만지며 이제 예쁘고 좋은 것(당시 나는 인터넷에서 구매한 만원짜리 1+1 쿨소재 운동복만 입었다)을 사라며 브랜드까지 추천해 주셨다. 성의를 받아들여 적는 척이라도 해야겠지 싶어서  메모를 하는 척 했지만 참견이 불편했다. 하지만 동시에 기뻤다. 다이어트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전쟁을 치르며 처음으로 가족이나 친구가 아닌 낯선 타인에게 관심을 받은 거다. 살 빠졌다는데 싫은 다이어터는 없었다. 나는 어색하게나마 매번 인사를 나누고 대화에 끼기 시작했다.


운동짐이 문을 닫던 날이 기억난다. 다들 집에 돌아가지 않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해외 여행 이야기를 했다. 어느 분이 필리핀의 어느 도시가 진짜 좋다느니 하면서 나에게 강력추천을 하셨다. 호텔과 음식점 이름까지 알려 주셨는데, 개인적으로 나는 동남아 음식이 맞지 않아 여행지로 고려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코로나가 끝나면 정말 가보고 싶다. 내가 운동을 하며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떴듯 어쩌면 싫다고 생각한 동남아도 내게 맞을지 모르는 일 아닌가.


운동짐 이후 등록한 필라테스 센터에서도 고수는 당연히 있다. 유연성은 물론 힘든 자세도 척척이다. 필라테스를 한지 일년 반이 지났지만 그분들의 절반도 따라하지 못한다. 사실 실력이 늘고 있는지조차 의문이지만 이젠 그러려니 한다.


일명 '고수'와의 만남으로 내 목표는 완전히 바뀌었다. 막연히 동경하전 멋진 몸매의 연예인에서 생활체육인의 포스를 뽐내던 그분들이 되었다. 흔히 아주머니로 지칭되는 중년 여성들의 열정과 패기, 체력과 노력은 알고보면 젊은이들 못지 않다. 숙련된 자세와 불평 한 마디 없이 모든 운동을 소화하는 모습은 내게 큰 충격과 인상을 주었다. 나도 나이를 먹으면 저럴 수 있을까. 꾸준히 운동하면 될 수 있을까?


날렵하고 단단한 팔뚝과 다부진 종아리로 빠르게 걸어 사라지던 그분들의 뒷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 아이 학원 갈 시간 전에 돌아가서 간식을 챙겨줘야 한다며 종종걸음을 치시던 뒷모습들. 각자의 가정과 자신을 돌보기 위해 분투하는 분들을 단순히 가정주부라고 부르는걸 사회적 손실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자기관리와 운동 루틴에 대한 성실함은 나같은 의지박약에게 깨달음을 주기 충분했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고 누구에게나 배울 점이 있다는 말을 그때 깨달았다. 지금은 얼굴도 흐릿한 그분들이 아직도 어디선가 열심히 운동을 하시면서 나같은 젊은이들에게 한수 가르쳐 주시고 있을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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