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여름 어느 일요일, 아파트 주차장에 덩그러니 놓인 피아노가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피아노는 왼쪽 다리가 부러져 기울어진 채 있었지만, 건반은 88개가 모두 있었고 소리도 잘 났습니다. 저는 피아노가 욕심났습니다. 마침, 피아노에 이런 쪽지가 붙어 있었어요.
[피아노 필요하신 분, 가져가세요. 아이들이 다 커서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피아노 다리가 부러졌지만, 소리는 잘 납니다. 2003호]
다행히 제가 2003호에 살던 분을 알고 있어서 곧바로 전화했습니다. 저는 피아노를 학교로 가져가고 싶다고 말했지요. 그분은 흔쾌히 승낙했습니다. 오늘까지 가져갈 사람이 안 나타나면 피아노 중고업체에 가져가라고 연락할 예정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피아노를 두고 오면서 생각한 것보다 훨씬 유용하게 쓰일 것 같다고 기뻐했습니다.
저는 동네 피아노 가게에 부탁하여, 주차장 건너편에 있는 학교까지 피아노를 옮기고, 조율하는 데 16만 원을 들여 해결했습니다.
학교에는 당연히 피아노가 있었지요. 하지만 강당과 시청각실, 그리고 음악실에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이 접근하기에는 제한이 많았습니다. 저는 교직원회의에서 그 피아노를 어디에 둘 지를 정하고, 피아노의 활용에 대해서는 학생자치회에서 정하도록 했습니다.
선생님들은 교사 앞동과 뒷동을 연결하는 통로 앞 라운지에 피아노를 두자고 정하면서 시끄러울까 봐 걱정했습니다. 선생님들의 염려를 전해 들은 학생자치회에서는 규칙을 정해서 전교생에게 공지하고, 규칙을 써서 피아노 옆 벽면에 붙였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선생님들의 우려와는 달리 아이들은 규칙을 잘 지켰습니다. 물론, 많은 아이들이 모여들다 보니 처음에는 좀 시끄러웠지요. 피아노를 연주하는 아이, 구경하는 아이, 연주 신청을 하는 아이들로 학교 안에서 가장 붐비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학생자치회에서는 피아노를 관리하는 데 점점 지혜를 발휘했습니다. 현장에서 피아노를 치는 순서를 정하는 것이 번거롭고 벅차게 되자, 규칙을 붙여둔 옆자리에 또 하나의 종이를 붙였습니다. 그리고, 그 종이에 신청자가 직접 자기 이름을 써넣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순서가 되도록 해결하는 것을 보고 저는 아이들의 자치 능력에 놀랐습니다. 아이들은 선생님들이 기대했던 이상의 능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사실, 많은 아이들은 집에 피아노가 있었습니다. 피아노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도 많았지요. 그런데, 친구들 앞에서 마치 연주회를 하는 것처럼 연주하면서 뽐내는 기분이 좋았던 것 같아요. 어떤 아이는 연주를 잘하는 친구를 보면서 자극을 받아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또 처음 피아노에 호기심을 갖게 된 아이들은 마치 장난감 피아노를 두드리듯 더듬더듬 연주해도 창피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제가 근무하는 동안, 그곳은 학교 안에서 <핫 플레이스>였지요.
그리고, 저는 뜻밖의 교육적 효과를 얻고 기뻤습니다. 다른 악기를 연주하는 아이들이 욕심 내어 학생자치회와 함께 <등굣길 버스킹>을 기획하였습니다. 여러 아이들이 개인이나 모둠별로 출연을 신청하여 다양한 연주를 보여주는 것으로 확대된 것이지요. 학생자치회가 주관하여, 아이들은 매주 목요일 등교시간에 맞추어 정문 안뜰에서 버스킹을 이어갔습니다. 그중 바이올린과 오카리나를 연주했던 두 아이는 깜짝 놀랄 만한 수준이었다고 기억합니다. 또 열의는 넘치는데 연주 솜씨는 어설퍼서 오히려 더 많은 격려를 받았던 아이도 있었습니다.
저는 피아노 연주나 버스킹에 참여하는 아이들이 준비하는 과정과 실제 연주를 통해 얻는 성취감이 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이들이 성장하는 동안 분명히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리라는 교육적 믿음이 있었지요. 친구들의 피아노 연주를 관람했던 아이들 또한, 훗날 아이들의 영혼과 삶을 풍족하게 해 줄 영감을 얻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어느 날, 한 선생님이 제게 왔습니다. 그 선생님 반에 피아노를 잘 치는 아이가 있는데, 집에 있는 피아노가 좋지 않아서 학교에 있는 피아노를 치고 싶어 한다는 말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라운지에 있는 피아노를 연주할 때 저를 초대했어요. 저는 그 아이의 피아노 연주 실력에 깜짝 놀랐지요. 그 후, 저는 큰돈을 들여 인근 학교에는 없는 음질이 좋은 전문가용 피아노를 샀습니다.
행정실에서는 학교용 피아노로는 너무 비싼 것 아닌가 걱정했지요. 저는 2천 명 아이들의 미래와 학교 규모에 맞는 것이라고 설득했습니다. 대신, 그 피아노는 악기 특성상 일정 수준이 되는 아이들이 칠 수 있도록 규칙을 추가하도록 했지요.
세월이 흘러, 제가 교육청에서 장학관으로 근무할 때였습니다. 제가 교장으로 있던 학교에서 함께 근무했던 선생님이 제게 동영상 파일을 보냈어요. 한 소년이 <베토벤 소나타 17번 d단조 템페스트>를 연주하고 있는 영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이 곧 전화를 해서 설명해 주었습니다. 동영상 속의 소년이 전문가용 피아노를 사게 했던 그 아이인데, 예술고등학교에 가게 되었다고요. [전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