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좀 바뀌면 어때>
어릴 때부터 난 습관적으로 혼자 상황극을 만들어 연극을 하는 버릇이 있었다. 학생일 땐 첫날 등교하고 나서 내 옆에 누가 앉을지 상상하고, 임의로 정한 내 짝꿍과 얘기하는 연극을 혼자 하기도 했다. 취준생 시절, 면접을 앞둔 날이면 그 상황극은 더욱 심해지는데 소변을 볼 때든 샤워를 할 때든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이 상황극은 시작된다.
“김형주 씨 자리에 앉으시구요. 김형주 씨는 지원동기가 뭐죠?”
“저는 저의 역량을 발휘하여 이 회사에 큰 도움이 되기 위하여... (생략)”
“아 네 잘 들었구요. 자소서를 보니까 운동을 좋아하시네요. 어떤 운동을 가장 좋아하시죠?”
“저는 축구를 가장 좋아합니다. 개인 종목보다는 단체 종목을 선호하며... (생략)"
“네 잘 들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물론 1인 2역이다. 나밖에 없는 화장실에서 다른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오니 거실에 계신 어머니는 언제나 놀란 목소리로 화장실 문을 노크하신다. 똑똑똑.
“별일 없니? 누구랑 얘기하는 것 같던데?”
“아 괜찮아요. 엄마!”
그렇게 혼자 상황극을 연습하느라 2시간씩 샤워를 하곤 했다. 하루 온종일 수십, 수백 가지의 상황극을 생각하다 보면 일상 속에서 생기는 갑작스러운 상황들도 크게 당황스럽지 않다. 이미 내 머릿속에서 한 번씩 지나갔던 상황이니까. 상황에 맞는 대본도 완벽하게 머리에 저장되어 있다 보니 가끔 순발력이 좋다는 말을 들으면 노력형이라는 말이 입에서 맴돌기도 한다.
미국 하이틴 영화들을 보면 부자인 친구 집에서 수십 명이 파티하는 장면이 나오곤 한다. 사이킥 조명이 나를 감싸고 손에는 칵테일인지 뭔지 모를 보틀을 들고, 옆에서는 잘생긴 친구들과 함께 수영장에 앉아 이성 친구들과 얘기를 하는 장면. 맞다. 미국 가기 전 난 그런 걸 상상 하곤 했다.
“하이 제임스, 하이 엘리스! 나는 2층 가서 놀고 있을게.”
“그래 데이빗! 조금 이따 봐!”
역시 이게 미국이지. 하지만 나의 초반의 미국 생활은 상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수업이 끝나면 약속은커녕 그냥 우리 집 2층에서 컴퓨터나 하고 있는 전형적인 아웃사이더의 모습이었다. 상상으로만 끝내고 싶지 않아서 난 새로운 친구를 찾기 시작했고 하나의 그룹을 만들기 시작했다. 결국 나도 머릿속에서만 그리던 파티의 밤을 실제로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나이가 조금씩 더 들면서 당장 닥칠 일을 상상하기보단 조금 더 먼 내 미래에 대한 상황극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회사에 취업했을 때에는
‘내가 30살이 되면, 1억을 모아서 집을 하나 살 거야. 그리고 여자친구와 함께 여행을 떠나야지.’
라는 생각을 하며 1억을 가지고 은행에 가서 상담을 받는 상황극을 하기도 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는
‘나는 사업을 시작해서, 35살에 10호점을 열고 직원을 월급도 많이 주면서 편한 삶을 살고 싶어.’
라는 생각을 하며 각 지점 점주들을 한자리에 모아 회의를 하는 상황극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현재 32살이 되어가는 난, 1억을 모으지도, 집을 사지도, 사업을 하고 있지도 않다. 머릿속에서 상황극으로만 끝났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노력을 안 했으니. 20대까지만 해도 ‘아직 20대니까 괜찮겠지’라는 핑계를 대면서 시간을 보냈지만 30살이 넘어가니 이제는 댈 수 있는 핑계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다시 철부지 막내였던, 핑계로만 가득했던 내 삶으로 돌아간 느낌이 들었다. 아무것도 안 하면 안 바뀐다는 걸 잘 알면서도 이놈의 몸뚱이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루가 지나가면 어제를 후회하고 오후가 되면 오전이 후회되었다. 이제는 더는 머릿속에 새로운 상황극이 떠오르지도 그려지지도 않았다.
이렇게는 안 되겠어. 그런 생각이 든 순간 이불을 박차고 밖으로 나왔다. 미국에서 새로운 첫 친구를 찾았던 때 마냥 새로운 꿈을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2021년 5월부터 난 한 달마다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기 시작했다. 블로그 강사, 전자책 판매, 유튜브, 브런치 작가, 그리고 곧 있을 프로젝트인 사진작가까지. 다시 머릿속에 새로운 상황극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지금도 난 미래의 내 모습을 상상하곤 한다. 부자가 된 내 모습, 좋은 동반자를 만나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사는 내 모습,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있는 내 모습을. 1년 전에도, 2년 전에도 그때 조금만 더 했다면 그리던 목표를 조금 더 도달하지 않았을까라는 후회를 매년 하고 있지만, 게임도 몇 달만 하면 질려버려 게임 폴더에서 삭제하는 스타일인데 후회도 몇 년 동안 하다 보니 이제는 지겹다. 그러니 과감하게 삭제 버튼을 눌러본다.
'후회를 삭제하시겠습니까 ?'
"예"
후회를 삭제하고 나니 과거보다 오늘에 더 초점이 맞춰진다. 요즘 좀 열심히 살고 있는 것 같긴 하다. 최근 열심히 글을 쓰다 보니 감사하게도 브런치 구독자가 50명을 넘었다. 문득 머릿속에 새로운 상황극이 떠오른다. 구독자가 1,000명이 돼서 내 책을 출판하고 작가 사인회를 하는 장면이. 나중에 후회하기 전에 얼른 글이나 쓰러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