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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늬 Moon Jul 02. 2024

불혹도 브런치도 에필로그

남 몰래 사랑하는 

최근 아크릴화를 배우게 되었다. 우리에게는 공간과 시간과 배울 마음이 있었으며 기초부터 배우는 성인, 직장인반인 셈이다. 1회의 배움으로 단기속성의 힐링 시간을 가지는 것이 목표쯤 되겠다. 

처음 뛰어든 분야라 도구, 기법이 익숙하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 우리는 직장인반답게 월급의 일부를 떼어 호기롭게 초보들에게 필요한 캔버스와 물감세트, 몇 종류의 붓과 이젤을 주문했다. 강사를 섭외하여 수강료를 입금하고 우리의 공간으로 방문지도를 의뢰했다. 



드디어 배움은 시작되었다. 단기과정 안에서 또 단기 과정으로 선을 그리고 입체 도형을 그렸다. 초등학교 입학 직후에 학생들이 수없이 하는 가로선, 세로선, 사선을 그렸다. 아이들이 투덜대는 것과 똑같이 우리는, 반듯하게 잘 그려지지도 않으면서 다음 단계를 기대했다. '단기속성이 목표'니까, '내 힐링은 그림을 시작하면서부터'라고 믿으면서 더 많은 것을 원하는 첫 제스처로 수업을 기다렸다. 

학생들의 요구에 휘둘린 건지, 강사의 원래 의도인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곧 입체도형 단계에 들어갔다. 입체도형은 선 그리기보다 높은 수준의 원근감, 도형에 대한 이해를 요구했다. 우리는 붓을 손에 든 지 몇 주 이내에 저마다 작은 벽에 부딪혔다. 그렇지만 아직까지는 단단하게 그림에 대한 의지가 있었다. 

그리하여 첫 번째 모작할 작품을 가지고 다음 수업에 모였다. 마음속에 품은 기대 수준과 초보 실력의 격차를 짐작조차 하지 못한 채 갖가지 이유로 멋진 작품들을 선택했다. 내가 모작할 작품은 무려 고흐의 작품!



선생님은 기가 막히셨나 보다.

"와~고흐예요? 그 거장도 말년에서야 그렸던 화풍인데 그걸 첫 작품으로 하시겠다? 진짜 잘하셔야겠네."

놀림은 아니지만 잘 해내야겠다는 의지만은 확실히 주셨다. 그리고 나는 그 말을 들은 이후 몇 주 동안 미술 수업 요일이 아닌 수많은 저녁 시간에 캔버스 앞에 앉았었다. 

감히 거장의 말년을 우습게 보거나 강사님의 말에 대한 반발 심리 같은 것은 아니었지만 내 선택에 몰입하고 싶었다. 수십 일 동안 수강생과 강사님을 만나지 않는 시간 동안 수면 아래서 발버둥 치던 내 백조 다리가 어느덧 마무리에 들어섰다. 내 그림을 앞에 둔 사람들이 멋지다고 감탄했다. 안 보이던 수고가 인정받는다는 생각에 내심 힘도 났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목표로 했던 '힐링의 시간'은 잘 그렸다 멋지다는 칭찬을 들었을 때가 아니었다. 내 작품에 대한 애착으로 남이 뭐라든 수없이 그림 앞에 앉았던 기억, 그에 쏟은 시간과 고민과 수천 번의 붓질이 있던 시간이 그리웠다. 그것들이 지나가버린 것이 아쉬웠다. 예상보다 훨씬 크게.

나는 그때 알았다. 내가 사랑한 것은 그림의 완성도가 아니었음을.



내가 사랑한 것은, 온 마음으로 무엇을 위해 최선을 다하던 나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걸 얻었으니 이제 하산해도 될 것 같았다. 어쩌면 우리 인생과 비슷한 얼굴을 한 미술 수업도, 불혹의 시간도, 그 동안의 글들도 안녕이다. 

오늘 이 아름다운 마무리를 짓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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