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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늬 Moon Jun 18. 2024

워킹맘 몇십 년 차의 넋두리

무서운 것들

얼마 전 시골집에 감자를 캐러 갔다. 그날도 부모님은 일을 하시다 저녁노을을 맞으셨다. 함께 일하는 척만 하듯이 뒤늦게 도착한 나는 역시나 흉내만 내다가 일은 끝나버렸다. 빨간 감자들처럼 내 부끄러움은 줄기마다 달려 나왔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이 나왔을 때 인기만큼이나 논란도 뒤따랐었다. 요즘 그 책을 읽었을 때가 생각나곤 한다. 인생을 24시로 따진다면 당신은 몇 시인지 생각해 보라는, 나이가 많다고 느껴지더라도 사실상 크게 늦지 않았음을 느껴보라는, 그래서 무엇인가 도전하라는 메시지에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이 그러하므로 그 책을 읽을 때 적어도 나는 청춘은 아니었나 보다. 서른 하고도 몇 살이 지났을 때의 나 자신을 향해 늦지 않았다고 다독였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있는 것을 보면.



아이들은 무척이나 더디게 자랐다. 그런데 아이들이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니면서부터는 시간도 아이들도 너무나 빠른 속도로 달라져갔다. 나이에 따라 시간이 흐르는 속도도 다르게 느껴진다는 말은 아들딸이 많이 컸구나 느꼈을 때부터였다. 잡을 수도 없지만 잡을 엄두조차 나지 않도록 빠르던 시간들. 설령 그때의 시간을 잡아둘 수 있었다한들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지 모르는 채로 다시 시간은 흘러갔을 것이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기꺼이 가난한 젊음과 바꾸어도 되리만큼 나는 지난날의 나를 후회한다. 그때의 내가 무섭다.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 어떤 방법으로 속도와 방향을 조절해야 하는지 모르는 상태로 참 오래 지났을 텐데 정작 그렇게 살고 있음도 모르던 그 무지가 무섭다.

무지 속에서 기르고 가르쳤던 시간에 얼마나 많은 실수를 저질렀을지가 무섭다. 그 많은 실수에도 잘 자라나 준 아이들(공적인 아이들, 사적인 아이들 모두)이지만 어쩌면 마음 한편에 아팠던 기억이 남아있을까 봐, 내 뒷모습을 보고 어둡게 자랐을까 봐.



내가 잘못 살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굳이 확인시켜 주는 일들. 이런 것들이 요즘 부쩍 무섭게 다가온다.

처음 해보는 부모역할이라는 핑계로 바람직하고 충분한 사랑을 주어 아이들을 키우지 못한 시간들. 직장에 육아에 쫓겨 바빴다는 이유로 미처 돌보지 못한 사이 악화되는 부모님의 건강. 내 생활이 팍팍하다며 제쳐둔 친구들과의 만남과 미뤄둔 이야기들.

이 모든 것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지만 정작 어느 것도 제대로 이루어내지 못한 것은 아닐까 하는 자타의 의문.

열심히 잘 살아온 수고에도 산뜻한 박수를 주고받지 못하는 몇 십 년 워킹맘의 마지막 근무일에 느껴지는 동병상련. 이제야 감사와 행복을 표현하며 살고 있는데 시간은 빨리 흐르고 태풍처럼 모든 것을 휩쓸어 가 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



이 모든 무서움이 너무 늦지 않은 날 걷히기를 바란다. 120살 시대의 시계가 우리에게 주어졌다면 나는 아직 낮 12시를 지나지 않았으니 이 두려움을 애써 떨쳐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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