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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소음 Oct 27. 2024

15. 물 위를 걷는 사람(2)

물 위를 걷는 사람


  부친은 용돈인지 적선인지 모를 돈을 달에 한 번씩 건넸다. 나는 그 돈으로 알아서 먹고 알아서 입고 알아서 학교에 갔다. 목 안 깊은 곳에 꽁꽁 봉인된 말 대신 간결한 손짓과 몸짓으로 소통했다. 방이 급하게 치운 흔적이 남아 있는 창고든, 입고 있던 옷은 자신도 모르는 새에 의류 수거함에 버려지고 작아진 옷을 적선받았든, 불필요한 상처는 받지 않고 물음은 삼켜뒀다. 새벽같이 일어나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다가 요리와 설거지, 청소를 도왔다. 종종 사무칠 정도로 엄마의 생각이 들 때면 소리가 나지 않게 발뒤꿈치를 들고 종종걸음으로 집을 나서 바깥공기에 참았던 숨을 뱉기도 했다. 그날 밤 가진 것 중 가장 값비싼 것들을 핸드백 속에 모조리 챙겼으면서, 왜 혼자 조용히 떠나지 않고 잠든 나를 깨웠는지, 그 숲 앞까지 데리고 가서 마음이 바뀌었는지 나만 두고 사라진 이유는 무엇인지, 누구도 금기시하지 않고 주의 주지 않았지만 입에 꺼내지도 않았기에, 무심코 내비칠 그리움을 들키지 않도록 속으로만 되짚어보며 단념을 단념했다.     


  그날은 마침 주말이라 아빠가 회사에 가지 않아서 학교 반장 선거에서 세 표 차이로 낙선한 소년을 위로하고자 방문한 횟집이었다. 푸른 간판이 가까워지자 바다의 소금기 어린 냄새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물고기 비늘 냄새가 서늘하게 밀려 들어왔다. 2층에 영어 학원과 수학 학원이 있는 낡고 작은 빌딩의 1층, 몇십 년째 가족 대대로 운영하는 조그마한 횟집은 한때 파워 블로거들과 여러 이름난 방송의 방문이 끊이지 않았지만, 이제는 거리의 수많은 횟집 중 하나로 전락해, 돌부리처럼 솟아오른 보도블록 위에 포자처럼 피어오른 하얀 거품 자국만이 비릿한 물 내음을 품고 있었다.

  도란도란 정겨운 위로와 유머를 나누며 문을 여는 아빠의 뒤에 달라붙다시피 하여 횟집에 들어서다 무심코 시선이 흘러갔다. 좁고 탁한 수조 안에서 헤엄치던 팔뚝 만 한 생명과, 술잔이 맞부딪히며 허공으로 튀어 오른 알코올의 씁쓸한 냄새와, 쇠젓가락이 유리판과 대리석 바닥에 떨어져 나뒹구는 소리가 뒤섞인 시끌벅적한 장내, 구석에 있는 주방에서 일정한 박자로 물고기의 옆구리를 가르던 장인의 은빛 날을 향해.

  자리를 잡고 4인 세트로 시킨 뒤에도 가슴이 진정되지 않고 빠르게 뛰었다. 시간이 흐른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은, 짧은 기다림이 지나고 입 안으로 집어넣은 쫄깃한 살점에서 흐릿하게 느껴지는 박동과 선명한 생의 멎음, 구역감에 부풀어 오른 입을 한 손으로 틀어막고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목 안으로 넘긴 생명을 토해내고 변기 안에서 힘차게 팔딱거리는 물고기의 형상을 본 후 마침내 스스로를 경멸하게 된 물에 비친 얼굴과 그만 먹을래요, 처음으로 머금은 말.

  돼지고기, 소고기는 거리낌 없이 먹을 수 있으면서 유독 생선만 그런 건, 우스운 동정인가 모순의 끝자락인가, 도마 위 생선 대가리로 가차 없이 떨어지는 단두대 칼날이 오금이 저릴 정도로 섬찟한 이유는 무엇인가, 수조 너머 멍텅한 눈알을 마주한 때부터인가, 아니면 목구멍에서 튀어나온 물고기의 환영을 본 이후부터?

  나는 엄마처럼 정신 이상자가 아니다. 입맛에 맞는 것만 골라 먹는 편식쟁이는, 더더욱.

  아빠는 말을 할 줄 알면서 지금까지 왜 그랬냐고 다그치면서도 한편으론 병신을 떠안은 게 아니라 안심하는 듯했다. 심리상담가를 소개해 준다던 여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제 말을 철회했다. 아빠는 이전보다 다정하게 대하면서도 회 한 점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굶었던 그날은 통째로 기억에서 지워낸 듯 그 이후로도 종종 횟집이나 해산물 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음식점으로 외식을 제안하곤 했다. 소년은 입을 틀어쥐고 먹은 것을 전부 토해낸 그날 분명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얼굴이었는데, 아빠와 여자가 앞에 있어서 그런지 별말 없이 넘어갔다. 그러다 저녁으로 고등어구이가 나오면, 보란 듯이 생선 눈알을 젓가락으로 뒤적거리곤 했다. 옆구리를 찢고 까맣게 그을린 비늘을 벗겼으며 섬세하게 가시를 발라낸 두툼한 살점을 흰쌀밥 위에 친히 올려주기도 했다. 넌 날 괴롭히는 게 좋니, 도로 살점을 소년의 접시에 올리며 묻자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아빠를 번갈아봤다. 영악한 자식, 까만 눈동자 안에 가득 찬 감정의 이름을 읽지 못하고 이어지는 아빠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묵묵히 밥을 퍼먹으며 소년이 원하는 대로 장단을 맞추지 않자 금세 흥미가 식었다는 얼굴로 병신, 조소하며 속삭였다. 늘 그렇듯 단란한 가족 간 대화를 위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설거지를 하고 방으로 돌아가면서 까맣게 구멍 뚫린 생선의 눈알을 억지로 지워내곤 했다.

  문을 닫자 맞은편 거울에 내 모습이 비쳤다. 아가미도 없고 있는 힘껏 헤엄치지도 못하고 하물며 제자리에 떠 있는 것조차 어려워 착실히 가라앉는 중이라, 몸통이 토막 나고 비늘이 벗겨지고 기껏해야 터지는 플래시 속에 갇히거나 횟감으로 먹히는 물고기의 삶을 동경하고 연살하는 백치 같은 여자의 모습이.

  설거지를 마치고 이불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말똥한 눈으로 높은 천장을 보다 명치가 무엇인가 걸린 것처럼 답답해 조용히 집을 나섰다.

  가난한 사랑은 회신이 닿지 않는 곳으로, 닳아버린 낭만은 수조 안에, 수조에 가라앉은 물고기 똥이나 빳빳한 잿빛 비닐 덮개 위에 쌓인 먼지 같은 존재감은 별 볼 일 없는 동네 가장 낮은 곳을 비추는 가로등 불빛으로 겨우 연명하고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최근에 유행한다는 남자 아이돌의 노래가 조잡하게 뭉개져 흘러나와 엇나갔던 초점이 자리를 잡았다.

  정신을 차리니 호수에 다다른 뒤였고, 비관의 끝은 늘 그렇듯 암흑이었다.     


  눈을 뜨자 온통 새하얀 공간이었다. 몸을 일으키자 지척에 못이 덩그러니 있었다. 뚝뚝 끊겨 머릿속에 상연된 장면은 잊고 있던 기억을 하나둘씩 불러왔다. 조용히 다가가 못 위로 얼굴을 내밀자 온전히 얼굴이 비쳤다. 나이아가 아닌, 서수아의 얼굴이. 수면 위로 모든 것을 지켜본 숲이 가진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수신은 소년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 잊고 살아가길 바랐겠지만, 기억을 잊은 나는 호수에 몸을 던졌다. 눈을 떠보니 숲속이었고 바람에 휘날리는 나뭇가지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아득한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어느 순간부턴가 이름은 지워졌고 기억도 희미해졌다. 기억의 빈칸은 숲의 기억이 채웠다. 숲이 불어넣은 숨으로 모든 것을 알게 되었고, 겪지 않은 것을 기억하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숲에 동화되었을 때, 숲의 흐름에 따라 손끝으로 꽃을 피우고 시든 풀의 생명을 거두었다. 공백이라 불리길 원치 않아 숲의 이름을 빌렸다.

  나이아.

  아가미가 없어도, 헤엄을 못 쳐도, 숨을 쉴 수 있고 별을 볼 수 있고 물 위를 걸을 수 있다. 그 이름은 내게 아가미였다.

  나는 손가락으로 수면을 흐늘거렸다. 잔잔한 파동이 일며 수면 위로 둥글게 퍼졌다. 더 이상 지혜롭지 않은 눈으로 바라본 수면은 어두웠고, 깊었고, 아득했다. 하지만 두렵지 않았다. 실망도 없었다.

  이것은 즉 당신이다.

  그렇게 도달한 생각으로, 손가락 끝에 닿은 물에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가만히 두 눈을 감았다.

  수신.

  당신의 피와 살이 이곳에 있었구나.

  당신의 육은 못이 되었고 당신의 숨결은 생명을 피워냈다.

  끝내 이 숲을 사랑하고만 거야.

  끝내 나를, 사랑한 거야.

  이 못 안에 하늘로 승천하지 못한 용도, 바다로 넘어가기 전의 고래도, 왕자를 죽이지 못한 인어도 없어서, 다행이다.

  이제 막 꽃봉오리가 움튼 연꽃이 있어서,

  떨어진 이파리가 있고 연꽃 줄기가 있어서,

  기억 끝에 가라앉은 당신이 있어서……

  참 다행이다.

  이제 나에겐 아가미도 가족도 당신도 없지만.

  뭍을 밟게 한 사람도, 삶도, 죽음도 있다.

  그래……

  사람이다.

  헤엄치지 않아도 살아간다.

  당신이 없어도 삶은 이어진다.

  당신은 즉 물이니 뭍으로 갈 수 없지만, 당신이 쥐여준 생만은 뭍에 있다.

  늘 죽음을 곁에 두고 살았으나, 해영을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연민. 연민은 인간의 감정이다. 기어코 한 생을 허덕여서라도 얻고 싶은 간절한 것은 그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사람의 생을 얻고 싶었고 물 밑을 알고 무언가를 위해 자신을 걸 정도로 치열한 삶을 살아가고 싶었다. 살고 싶었다. 한 생의 피어남과 저묾을 갖고 싶었다. 그것은 무의식이 건 첫 번째 소원이었다.

  고마워, 밀려오는 기억을 느끼며 속삭였다. 공백이 다 채워질 때쯤, 어딘가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말했잖아, 네가 바라는 모든 것은 이루어질 거라고.

  고개를 들어 하얗게 물든 공간을 두리번거렸지만, 끝없이 광활한 공간에는 나뿐이었다.

  넌 살기를 바랐잖아. 인간으로. 명을 건다는 건 형식이었을 뿐 네가 바라지 않는다면 전부 형체 없는 말이야.

  목소리는 어느 한 곳이 아니라 사방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의문의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늦었지만, 난 항상 네가 살기를 바랐어. 네 온 생을 지켜봤으니까.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거야. 그러니 어서 눈을 뜨고 가 봐. 지금까지 함께 해줘서 고마워.

  뒤늦게 익숙함을 잡아챌 때, 그 말을 끝으로 화한 감각이 온몸을 휘감고 떨어졌다. 나는 감았던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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