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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영수 Oct 27. 2022

전역하는 날


보통 전역하는 날의 암묵적 룰은 날이 채 밝기도 전에 부대를 뜨는 것이지만 나는 전역하는 날에도 이것저것 챙기느라 해가 중천이 되어서야 겨우 출발했다. 또 새벽이 밝자마자 부대를 버리듯 허겁지겁 나가고 싶지도 않았다.


해는 이미 높이 올랐고 정문으로 가려면 부둣가를 30분은 걸어야 했다. 주말이라 아무도 밖에 나오지 않아 조용했고 갈매기 소리뿐이었다. 항구 밖에서는 예인선이 검은 구름을 뿜으며 지나가고 있었고, 구름이 그 뒤로 뽈뽈거리며 따라와 예인선이 구름을 끌고 가는 듯했다.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하지만 나는 구름이 담긴 풍경을 볼 때마다 같은 하늘 아래에 있을, 입대하는 순간부터 멈춰 나를 담장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나의 시간들을 떠올렸고 그러자 금방 초조해져 발걸음이 빨라졌다. 이 걸음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 몇백 일 동안, 나를 기다리고 있는 시간을 되찾으러 한 발자국씩 걸어온 것이었다.


간단한 확인 절차를 거쳐 정문을 통과했다. 서류를 확인한 병사가 부럽다는 표시를 내며 수고했다고 말해 주었다. 밖으로 나오니 해는 여전히 높았고 하늘의 구름도 같은 모양이었다. 아직 행선지를 정하지 못해 버스 정류장에 멍하니 앉아 있으니 버스가 내 앞으로 왔다. 버스 앞 유리에 비치는 내 모습이 낯설었다. 괜히 모자를 벗어 옆에 놔두려다 문득 나는 이미 나이를 많이 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대할 때 얼려둔 시간들은 이미 녹아 바다로 저만치 흘러 내려갔고 내가 되찾을 나는 이미 유통기한이 지났다. 나는 금세 피곤해져 그냥 집의 내 방으로 돌아가 낮잠을 자고 싶어졌다. 조금 긴 낮잠을 자고 일어나면 지난 2년을 그대로 들어내 버리고 끊어진 단면은 접착제로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20대의 어느 시점에 최초의 배반을 경험한다. 거죽을 뒤집어쓰고 울부짖지만 누구도 그 의례가 비가역적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려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의 탓도 할 수 없어 금방 말이 없어진다. 우리는 모두 수염이 나고 목이 쉬어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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