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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 10. 2023
서른다섯의 유서
가끔 유서를 쓴다. 무언가를 쓰는 행위, 그중 유서를 쓰는 시간은 '무엇이 중한지'를 볼 수 있다.
지나간 유서를 본다. 서른다섯의 유서는 이렇다.
남기는 글.
그곳으로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력서 같은 무미건조한 유서를 죽음의 문턱에서까지 쓰고 싶지는 않다. 죽음을 맞이하며 쓰는 글은 불완전하고 감정적이어도 되지 않나 싶다.
당신에게.
내가 울 때, 내가 힘들 때 당신은 내 곁에 없었다. 힘들다고 말을 해야 상대방이 안다는 걸 알지만, 부부이기에, 남편이기에, 사랑이기에 어느 정도는 알아주기를 기대했다.
반면, 당신의 마음이 고플 때, 당신의 일을 대신해 줘야 할 이가 필요할 때 그런 때에 나는 항상 당신 곁에 있었다. 우리가 함께 웃고, 함께 울 때는 당신의 일로 인한 것이었다. 나는 왜 당신을 사랑했던 것일까.
굳이 이유를 찾자면, 나는 그저 당신이어서라고 밖에 말할 수 없겠다. 그래서 내가 힘이 들 때 당신이 내 곁에 없어도, 당신이 힘이 들 때 마치 내가 당신인 냥 있었던 것은, 당신이어서라고 밖에 말할 수 없겠다. 나에겐 그게 사랑이었던 것 같다.
딸아.
엄마는 신을 믿지 않는다. 그런데 내가 너를 처음 가진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더구나. 아마도 그게 신이 있다면 신이었지 않나 싶다.
아이를 좋아하지 않던 나는, 너는 그렇게 끔찍이도 사랑했다. 부끄럽게도 나는 너로 인해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 나는 너로 인해 덜 이기적이 어지고, 더 많은 사랑을 채우게 되었으며, 영혼이 따스함으로 물들었다.
너는 세상이라는 것과 만나서 때론 가혹하고, 때론 원망스럽기도 하겠다만, 나는 잠자는 너의 모습을 보며, 슬쩍 발을 한번 만져보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웠다.
어미가 죽음을 목전에 두고, 가장 슬픈 것은 오직 나만 행복했던 것은 아닐까/ 나 자신만을 위하여 너를 낳고, 키우고 함께 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미안함이다. 딸아. 엄마는 네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어머니.
세상이라는 것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는 내내, 어머니와의 기억은 암흑이었습니다. 얼마나 더 시간이 지나야, 이 암흑이 옅어지고, 옅어질지 모를 울음을 갖고 살았습니다.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한참이 지나서도 저는 그 암흑을 걷어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세상에 사랑을 받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저 누군가는 조금 더 많이, 누군가는 조금 가볍게 사랑을 받은 것뿐'이라는 어떤 것이 왔습니다.
어머니는 제게 “세상에 거저 크는 사람이 어디 있냐.”라는 말을 여러 차례 하셨죠. 마치 부모가 자식에게 뭔가를 바라는 그 말투에 저는 진저리를 쳤었죠. 그런데 그 말에 답이 있더군요. 사람은 아기로 태어나 누군가의 보살핌이 없으면 언제나 혼자였던 것처럼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스물여섯, 젊은 나이에 울고 보채는 아기를 안고 어머니는 얼마나 우셨을까요. 삶이 폭하고 서러운 날에는 또 얼마나 더 우셨을까요. 지금도 어머니를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제게 주었던 사랑을 느끼고 갑니다.
나에게.
참으로 오랜만이다. 젊은 시절에는 나에게 종종 유서를 쓰곤 했었다. 그러면서 나의 먼 과거나, 현재, 미래에 대해 돌아보곤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저 현실을 살아가는데 급급한 좀비가 되어 버렸다.
나의 젊음은 항상 우울했다. 나는 나의 과거를 두려워했다. 하여 되도록 기억하고 싶지 않았고,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로 나의 과거를 묻어두었다.
그런데 지금 되돌아보면, 나의 과거는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나의 미래에 변화를 주고, 그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도와주기까지 한 것 같다. 나는 나의 삶을 조금 더 사랑할 필요가 있었다.
나의 기저에 깔려있는 우울함으로 원인을 돌리지 말고, 그곳에서 나올 수 있는 용기를 가질 필요가 있었다. 나에게는 생각보다 괜찮은 나와 가족과 친구가 있었다. 행복할 필요가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