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OOK이혜묵 Apr 22. 2024

그동안의 인간관계 청소

회사 게시판에 퇴직자 이름이 공고되었다. 대부분 임금피크제가 도래한 사람들이 퇴사를 결정한다.

임금피크제는 60세 정년이면 57세가 임금이 피크가 되고 정년나이 3년 전부터 임금이 매년 10% 씩 줄어드는 제도이다.

그래서 재 취업이 가능한 사람들은 임금피크제가 도래하면 명예퇴직을 신청한다.

내 나이는 아직 임금피크가 좀 남아 있었다.

아무 퇴직 소문도 없이 갑작히 눈에 띄는 인간의 이름이 퇴직자 명단에 들어 있어 궁금들 한 모양이다.


회사에서 그런대로 친하다고 생각한 인간들에 전화벨이 울린다.

그러나 누구의 전화도 받기 싫다. 


묻지 마라. 

왜 인간 이혜묵이 퇴직하는 지를.

무슨 좋은 계획이라도 있는지도 묻지 마라.


나도 이상한 기분이다. 

30여 년 다녔던 회사를 나오려고 하니 별 생각들이 든다. 옛날의 설움과 괴로움이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내게 좋은 추억과 기억은 없고, 왜 피해의식만 이렇게 겹겹이 쌓여 있을까?


첫 발령지였던 강릉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 마중 나왔던 사람들.

숙직날 밤 아들을 얻었던 제천의 기억, 

추운 겨울날 밤 제설작업 때 덤프트럭에 올라 삽으로 모래 뿌리던 일.

첫 공사 현장인 호남 쪽에서 고스톱을 못 처 빈털터리가 되었던 나날들.


휴가 내어 제주에서 친구들과 차를 마시다가 부사장의 전화를 받기 위해 밖으로 나가다가 넘어져 인생 최초로 무릎 깁스를 몇 달 동안 했던 사건.

본부대항 축구 선수로 뛰다가 수비수로 자살골을 넣었던 날에 창피함.

며칠 간 계속되는 야간까지 일하는 팀원들 위로한다고 술 먹다가 지금 어느 시기인데 술 먹고 있냐고 윗분에게 핀잔 듣던 사건

높으신 국토부 사무관한데 대들었더니 바로 윗분 한데 문자 해서는 혼쭐났던 일들


이제는 누구의 간섭을 받을 필요가 없어졌다.

그동안 직장생활이 이용당했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그리고 요즘 시체 말로 가스라이팅을 많이 당한 것 같다.

나의 정신을 황폐화시켜 지배력을 행사했던 인간들이 많았던 것 같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배신감 같은 것을 느끼게 한다.


퇴직이라고 특별한 행사나 팀원들이 해주던 회식도 큰 의미를 갖고 있지는 않았다.

그냥 한 세월 가족들과 나의 목구멍에 풀칠을 위해 급여 잘 받고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굳이 보기 싫은 사람 안 봐도 되고 전화통화 안 해도 된다.

다행히 휴대폰에 이름들을 저장해 놓아서 골라서 전화받을 선택권은 있다.

전화해서 받지 않으면 전화를 건 사람 입장에서 엄청나게 기분 나쁠 거라는 것도 안다. 

그동안은 어쩔 수 없이 업무상으로 아니면 짜웅을 위해 관계를 위지해 왔었다.

이제는 내가 골라서 인간관계를 만들 수 있다.


누군가 내게 말한다. "OOO가 몇 번 전화했는데 안 받는다고 하면서 전화 좀 받으라고 충고한다."

아직까지는 받고 싶은 생각이 없다. 

시간이 흘러 내 생각이 무뎌지면 그때는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상갓집이나 결혼식장도 최소화시켰다.

가면 또 꼴 보기 싫은 놈들 만날 수 있어서다.


다들 퇴직하면 퇴직자 단체에 가입을 한다. 그곳이 재정도 빵빵해서 가입만 하면 선물이 돌아온다.

그런데 난 가입하지 않았다.

누군가 나에게 그런다. 

숨어 살지 말고 광명 찾아 살라고 한다. 

못난 게 뭐가 있어서 그렇게 사람들을 만나지도 않고, 연락도 끈고 사냐고 한다.


사람들을 만나면 비교가 된다. 내 처지가 너무 보잘것없어 보인다.

그런 날 저녁은 잠을 이울 수가 없다.

남들과 비교하는 순간 불행해지기 때문이다

이전 03화 퇴직하던 날까지 영원히 일할 놈처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