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게시판에는 일 년에 봄 5월 말, 가을 11월 말로 명예퇴직 신청을 받는다는 공고가 뜬다. 매년 이때가 되면 조직에 부적응자인 나는 심란하다.
아무 계획 없이 그냥 훌쩍 떠나고 싶어서다.
그렇다고 조직 내 직원들 누구에게도 나가겠다고 언질을 하거나 상의하거나 티끌만큼이라도 눈치 채게 한적은 한 번도 없다.
괜한 이야기가 돌면 저놈은 일 안 할 놈, 회사 마라 먹을 놈, 나가려고 대충 일하는 놈, 업자들 돈 뜯어 먹고 이권이나 간섭하는 놈, 지 나가려고 돈이나 챙기는 놈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나간다는 것을 팀원들이 알면 업무지시를 해도 막말로 씨가 안 먹히게 된다.
진급도 안되어 다음 진급대상자에게 자리도 비워줘야 하고 가족들과 떨어진 생활이 10년 이상이 되어 집 근처로 가서 직장 생활을 정리하고 싶었다. 퇴직 3년 전에 인생 동안 가장 큰 혜택이라고 할 수 있는 집 근처 근무처로 옮겨 출근을 걸어서 하는 행운을 얻었다.
하지만 무얼 피하면 뮐 만난다고 이곳은 야간 차단작업과 일부 길을 개량하는 공사를 주로 하는 기관이다. 오래되어 움푹 움푹 파여 있거나 금이 많이 난 길을 전면적으로 아스팔트로 포장을 하는 곳이다. 교통량이 많은 금, 토, 일요일, 여름휴가철 15 일 그리고 한 겨울에는 다행히 작업이 중단된다.
신도시가 들어서는 곳에 새로운 진입로를 내는 공사도 있고 휴게소가 없는 곳에 휴게소를 만들기 위해 새로운 진입 길을 내는 공사도 관리해야 했다.
기존도로에 새로 연결되는 길을 만드는 것은 신도시를 개발했던 기관으로부터 예산을 받아 사업을 하는 곳이다. 도심지이다 보니 관련 민원들과 지하에 송유관, 통신사들이 깔아 놓은 통신관로들이 즐비하다. 한 곳은 8백억 원으로 사업이 시작되어 2천4백억 원으로 3배나 늘어났다.
그래서 돈을 주니 마니 서로 실랑이가 계속되고 있었다.
여기에다 어떤 놈이 계획을 했는지 돈이 부족한 현장에 경관을 좋게 하겠다고 방음벽 앞에 철판을 되어 미관을 높이기 위해 몇십억 원을 특정 회사 제품으로 계회해 놓았다.
지돈을 내면 이렇게 까지 했을까,
이를 빼는데 많은 협박을 받았다. 진급을 포기했으니 이것을 빼는 데 성공했지 다른 생각을 했다면 불필요한 비용을 빼지 못했을 것이다. 이 일로 특정제품 회사로부터 협박도 많이 받았고 내부관계자들 한데도 여러 번 전화를 받았다.
그냥 나두라고.
이 제품을 다른 현장에서도 삭감을 시켰다. 이 제품 사장은 두고두고 나를 원수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장애요인은 여기저기 숨어 있었다.
어느 시의회 의장은 자기 지역구를 챙긴다고 하천까지 준설해 달라고 한다. 어느 날은 전화를 하면서 갑작히
녹음을 하겠다고 한다. 이미 한번 찾아가 어느 정도 조율하고 하고 왔었는데 믿지 못했는 모양이다. 우리는 30분 이상을 녹음된 상태에서 통화했다. 어느 날은 현장 시공사가 새로운 다리를 놓기 위해 기초를 파다가 상수도관을 끈어 놓은 바람에 시의회 의장은 공사중단을 요청했다. 공사재개 조건으로 사람 다니는 길을 만들어 달라 마을길도 포장해 달라, 우수관도 주변 하천까지 지하로 연결해 달라는 부대조건을 달았다.
이곳 다리공사가 휴게소 진입로를 만드는 가장 긴급한 공사였는데 미치게 만든다. 돈이 남는 다면 무엇을 못해 주겠는가. 아무튼 그 시에 관련 공무원들과 잘 협의하여 업무를 조정함으로써 며칠 뒤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교통량이 많아 새로운 길을 내는 현장도 얽히고설키는 일들이 한 둘이 아니다. 알 박기 비슷한 곳이 하나 있어 다리공사를 들어갈 수가 없었다. 주인 설득하는데 2년 이상 걸렸다. 아무튼 잘 아는 사람이 더 한다고 옛적 공무원 출신 집안이었다.
다리발이라도 하나 먼저 시작하려고 보상 전에 굴삭기를 집어넣어 보려 했지만 이번에는 같은 회사의 현장 책임자가 반대한다. 인입 상수도관, 전기선이나 가스관을 끊으면 누가 책임져야 하느냐고 따지는 바람에 포기했다.
이놈을 교체한 뒤에서야 일이 쭉쭉 진행되기는 했지만 얄미웠다.
매월 본사나 지역 국회의원은 왜 그렇게 일이 추진이 늦냐고 따진다. 그리고는 국회로 호출한다. 머리를 조아리며 만해 대책과 언제까지 일을 마무리하겠다고 약속을 하고 나온다. 가끔은 현장으로 직접 찾아와 독촉을 한다. 내가 봐도 빨리 해주어야 할 사업이었다. 서로 책임지지 않으려고 기관 간에 면피용 문서들이 오간다.
같은 조직인 안전과 품질을 담당하고 있는 부서는 중대재해처벌법이 시작되어 미흡한 사항이 조금만 있어도 수시로 작업중단을 내린다.
철근, 콘크리트 등 자재비는 폭등 중에 있어 시공사도 이제는 배 째라는 식이다. 기존 길에 많은 차량들이 다니고 있어 공작업공간은 좁아 일에 능률도 오르지 않는다.
여기에 갑작히 휴일 많은 차들이 다니는 길이 싱크홀처럼 꺼지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고, 비가 많이 오던 날 침수가 되기도 했으며 다리를 올려놓았는데 화물차가 지나가다가 다리하부를 받아 훼손되는 일 등 큰 사고로 이어질 뻔한 일들이 여러 건 발생했다.
구멍 난 공간에 아스팔트를 끓여 직접 넣어 보기도 했다.
뒷짐 지고 있는 놈들은 나오지 마라. 나랑 같이 직접 일한 놈들만 현장으로 모여라는 식이다.
문제가 생기면 해결방안 없이 돈만 달라는 식이다.
지하배수관에 물이 새고 있어 길어 꺼지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우왕죄왕이다. 인터넷을 뒤져 하수관을 로봇으로 보수하는 업체를 시공사에 찾아주었다. 이제는 일정이 안 맞아 며칠 기다려야 한단다. 안 되겠다. 직접 동화해서 급한 일이니 빨리 와달라고 사정을 했다. 결국 다음날 하수관을 때우고 길을 덧 포장해서 문제를 해결했다.
여기에 멀리 원주와 진천 쪽 포장 보수공사도 내 관리영역이었다. 본사에서는 팀 하나를 더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하더니 기획부서에서 그 약속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아무튼 말없이 일하는 놈은 얼마든지 업무를 주어도 괜찮아하는 식이다.
급기야 토목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나에게 건축, 전기, 조경 업무까지 총괄하도록 업무를 준다. 중대재해처벌법으로 사고가 나면 죽일 놈으로 만드는 초기였기 때문에 책임 일은 절대 안 하겠다는 심보들이다.
아무 불만도 제기하지 않았다. 가끔 현장에 대고 큰소리는 첬지만 조직 내에 대해서는 짜증 내지 않고 일했다.
매일 사무실 출근하면 공 현장 CCTV를 본다.
출퇴근 시간에는 차들이 꽉 막혀 움직이질 않는다. 지나가는 운전자들은 얼마나 짜증 날까. 공사는 한다고 가림막도 처저 있고 흙먼지가 날리긴 하는데 눈에 들어오는 변화는 별로 없다. 서로 책임 떠넘기기 싸움질만 몇 년 해 오고 있었으니...
문제를 풀어 보려고 여기저기 많이 뛰어다녔다.
어떻게 하면 빨리 진행될 할 수 있을까 CCTV를 보면서 고민해 본다.
인천상륙작전처럼 일을 빨리 할 수 있있도록 획기적인 한방이 필요했다.
기존 계획들을 변경할 수 있는 방법들이 무엇이 있는지 여러 방안을 제시변경해 보았다. 한쪽 방향만 먼저 개통하는 것도 기존도로의 옆구리를 터서 다른 작업과 함께 병행할 수 있는 방안도 모색해 보았다.
또한 6개월 이상 한 개 차로를 막아야 할 것을 5일 저녁만 작업해서 교통이 막히는 것을 해결하는 것도 내 머리에서 나온 것이다.
나의 자랑질이라고 여길 수 있지만
현장 책임자나 시공사는 무조건 안 되는 방법만 생각하는 사람들 같았다.
급기야 본사 높은 분들은 매월 공사확인 겸 진척상항 독려를 위해 현장을 왔다. 나는 또 국회에 불려 가 높으신 의원님께 꾸지람을 받았고 지역구 사무실 직원과는 개통이 늦어지고 있는 것에 대하여 사과 현수막을 걸어라는 요구도 했다. 이 문제로 지역구 국회의윈 담당자와는 한 시간 이상 언쟁을 했다.
이곳을 개통하기 위해서는 돈 받는 시설도 설치해야 해서 건축, 전기, ITS, 설비, 조경 등 토목뿐만 아니라 다른 공정들도 함께 챙겨야 했다. 개통을 위해서는 누락되는 일이 없어야 했다.
또한 진척상황을 공유해야 다음 공사를 들어갈 수 있다. 작업공간이 좁아 콘크리트를 처 놓았는데 건축이나 전기 차량들이 바로 다닐 수 없기 때문이다.
매월 단위로 시공사, 감리, 현장책임자 회의를 했다.
사직서를 쓰기 전날도 이런 회의를 했으니 직원들이 나의 퇴직을 알아차릴 리가 없다.
조직을 떠나기 전까지 정말 실컷 일을 해 봤다. 나 혼자만 했던 일은 아니지만 같은 팀 내에서 나를 따라 주었던 배짱 있던 팀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직원들의 안이 옳으면 절대 간섭하지 않았다. 그리고 문제가 있으면 나에게 다 미루라고 했다.
나의 열정을 쏟았던 이 길은 내가 퇴직하고 15일 뒤에 임시개통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