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안데르센 세계 명작 - 미운 오리 새끼
비에 젖은 나의 두 날개는 점점 무거워졌습니다.
앉을 곳을 찾으려 개천가 바위를 살피는데 한 아이가 눈에 띄었습니다.
까만 피부와 더 까만 눈동자의 아이. 까르르 웃으며 뛰어다니는 동네 아이들과는 많이 달라 보였습니다.
아이는 비둘기들이 하도 똥을 갈겨서 하얗게 똥 길이 만들어진 넓적 바위 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낯선 사람은 조심해야 해. 특히 아이들.
엄마의 타이름이 떠올랐지만 아이 옆으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가 들이치지 않는 곳은 거기뿐이었으니까요.
아이의 눈치를 보며 가쁜 숨을 고르느라 내 어깨가 자꾸 들썩거렸습니다. 내 흉내를 내는 건지 아이도 어깨를 들썩였습니다. 할긋 보니 아이는 울고 있었습니다. 살금살금 다가가 아이의 운동화 끝을 콕콕 쪼았습니다.
-시아빠 나마무? 카우 ⁺부릉 말레오?
90일 평생 처음 듣는 말이었습니다. 개천가 아이들 말은 알아들었는데 대체 이 아이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난 고개를 갸우뚱거렸습니다.
-이름이 뭐야?
아이는 이번에는 다정하게 말을 걸었습니다. 그것도 내가 아는 말로요. 내 고갯짓이 통했나 봅니다.
-이름? 없어, 난 그냥 막내야.
아이는 내 말을 알아듣는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사실 내 대답은 절반은 진실이고 절반은 거짓이었습니다. 오직 엄마만 불러주는 이름, 뿌릉! 다른 오리들에겐 비밀인 이름이 있으니까요, 뿌릉!
-넌 집이 어디야?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 가족들은? 너도…… 집에 아무도 없니?
아이는 계속 내게 물어보고 있었습니다.
어느새 난 아이의 무릎에 자리를 잡고 누워 있었고요, 참 따뜻했거든요. 아이는 까만 내 몸통을 가만가만 쓸어주었습니다.
아이가 말을 할 때마다 무릎이 흔들흔들, 내 머리도 이리저리 움직였습니다. 몇 번 흔들리다가 설핏 나의 첫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엄마와 눈을 마주치던 그 날이요.
덜컹덜컹! 소리가 요란했었죠. 어찌나 빠르게 흔들리던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침인지 저녁인지도 모를 시간이 한참 동안 흘렀습니다.
잠시 멈추는가 싶더니 내 몸이 아래로 쏠렸습니다. 슈우우우우웅! 땅속 끝까지 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쿵! 뭔가와 부딪쳤어요. 껍질과 내가 분리될 뻔한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다시 떼굴떼굴 굴러갔습니다.
풍덩! 이번에는 어디엔가 빠졌지요.
그다음은 둥실둥실! 떠내려갔습니다. 기억이라는 것이 생기고 처음으로 만난 좋은 느낌이었어요.
-풀 섶에 못 보던 알이 있어요.
-내버려 둬요. 오리알도 아니구먼.
-어떻게 그래요. 아직 따뜻한데.
밖에서 들리는 두런두런 소리가 들렸습니다. 난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껍질 안에 있는데도 이상하게 추웠거든요. 난 자꾸만 더 따뜻한 곳으로 파고들었습니다.
-아악! 어떡해요? 알이 깨졌어요.
-거봐요. 내가 근본도 없는 알이라고 했잖아요. 저것이 다른 오리알을 밀어냈잖아요.
-그럴 리가요?
-봐요. 저 큰 알이 가운데 떡하니 있는 거. 내가 뭔 일이 생길 줄 알았다니까.
웅성거림이 들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나는 땅속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내가 죽은 줄 알았나 봅니다. 나 때문에 다른 알이 깨졌다는 것을 알고는 내가 죽은 듯이 가만히 있었거든요.
땅속은 생각보다 괜찮았습니다. 따뜻하고 촉촉했죠. 갈수록 더 따뜻해졌고 내 몸집은 하루가 다르게 커졌습니다. 너무 커져서 옴짝달싹할 수 없었습니다.
‘아, 답답해, 숨도 못 쉬겠어, 나가고 싶어!’
나는 있는 힘을 다해서 기지개를 켰습니다. 머리도 날개도 발도 쭉쭉 뻗쳤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쩍!
갈라졌답니다, 껍질이 갈라지자 틈새로 흙이 마구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나는 숨이 막혀 발버둥 쳤습니다.
-봐요! 땅이 꿈틀거려요, 그 아이가 살아 있다고요!
확신에 찬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엄마였습니다.
-에이, 지렁이일지도 모르잖아요.
옆에서 뭐라고 하든 말든 엄마는 곧장, 나를 덮고 있던 흙을 파내기 시작했습니다. 엄마의 부리가 바쁘게 움직였습니다. 나도 버둥거렸습니다. 어서 빨리 흙과 이별하고 싶었습니다. 버둥버둥!
- 아…가?
드디어 엄마와 마주했습니다. 처음엔 엄마의 얼굴이 안 보였습니다. 엄마 뒤에서 밝게 빛나는 햇살 때문에요. 곧 햇살 보다 열 배는 더 밝았을 엄마의 눈을 보았어요. 엄마는 나를 보고 깜짝 놀란 것 같기도 했습니다. 고개를 꺄우뚱거렸지만 곧 나를 꼬옥 안아주었습니다.
엄마와 만난 첫날의 이야기는 하면 할수록 재미있어집니다. 아이 무릎 위에서 한참을 재잘거렸으니까요. 아이는 어느새 잠이 든 것 같았습니다. 서로의 체온은 따뜻했습니다. 나는 자장가처럼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막내야, 넌 물갈퀴가 없단다. 항상 발을 모으고 더 빨리, 더 세게 저어야 해.
엄마의 다그치는 소리에도 내 수영 실력은 좀처럼 늘지 않았습니다.
-물고기를 잡을 때는 빨라야 한다, 독수리처럼!
엄마의 바람과는 딴판으로, 나는 비린내가 진동하는 물고기를 잡아먹느니 차라리 죽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어느 날, 개천가를 지나던 사람이 방울토마토를 물에 떨어뜨렸습니다. 엄마는 얼른 주워서는 잘게 씹어 내게 먹였습니다. 천국의 맛이었어요. 정신없이 방울토마토를 먹어 치우는 나를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내려다봤습니다.
그날 이후, 엄마는 개천가 쉼터에 자주 올라갔습니다. 떨어진 방울토마토가 있는지 찾아보려고요.
-뿌릉!
방울토마토의 새콤달콤한 맛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소리쳤습니다.
-앗! 몇 시야?
까만 피부에 더 까만 눈동자를 가진 아이는 화들짝 놀라 깼습니다. 자동차 불빛 여럿이 우리 곁을 빠르게 지나갔습니다.
-집에 가야겠어. 뜨를람밧, 늦었어. 마미가 공장에서 돌아왔을 거야.
아이가 급하게 일어서는 바람에 나는 아이의 무릎에서 떨어졌습니다.
-마아프, 미안해. 딩인, 추워.
아이는 겅중겅중 바위와 모래톱을 뛰어넘었습니다. 징검다리를 건너다 말고 내게 돌아섰습니다.
-너도 얼른 집으로 돌아가! 엄마가 있는 곳으로. 알았지? 부릉 말레오!
아이는 휘리릭 개천가로 올라섰습니다. 두 손으로 손나팔을 만들어 소리쳤습니다.
-부릉 말레오는 엄마의 나라 인도네시아의 새야! 행운의 새, 무주르!
아이는 금방 주택가로 사라졌습니다.
그 사이 비가 그쳤습니다. 혼자 남았습니다. 꽈르릉! 물소리가 갑자기 무섭게 들려왔습니다. 엄마 품을 몰래 빠져나온 것이 후회되었습니다. 바위 끝에 서서 온 힘을 다해서 날갯죽지를 펼쳤습니다.
-뿌릉아, 절대로 네가 멀리 날 수 있다는 것을 들키면 안 돼.
엄마는 당부하고 또 당부했었습니다. 어깻죽지가 간질거려 잠 못 든 날, 쇠백로와 왜가리의 날갯짓을 흉내 냈던 날, 수백 번 개천에 머리를 처박고 마침내 쉼터 벤치까지 날았던 그 날에도. 그때마다 엄마는 슬퍼 보이는 눈으로 조용히 화를 냈습니다.
주변을 돌아보았습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엄마를 보고 싶은 마음이 컸거든요. 날개를 펴고 펄럭이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오리가 봐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만큼만 날아갑니다. 바위와 바위 사이를 건널 만큼 딱 그만큼만.
내 이름이 왜 ‘뿌릉’이냐고요?
다른 오리들이 ‘꽥꽥’ 소리를 낼 때 나는 ‘그억 그억’ 쉰 소리만 냈습니다. 얼마 전 개천가에서 아이들이 내게 돌멩이를 던졌습니다. 난 너무 놀라 소릴 질렀어요. ‘뿌릉!’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온 말이었습니다.
엄마는 인공폭포 근처 으슥한 곳에 있는 바위 위로 나를 데리고 갔습니다.
-막내야, 아까 뭐라고 했어?
-뿌…릉.
-다시!
-뿌릉뿌릉!
-그래그래, 뿌릉. 근데 엄마 앞에서만 그렇게 말해야 해. 알았지? 다른 오리들에겐 비밀이야, 우리 뿌릉이.
그리고 엄마는 이렇게 말을 이었습니다.
-뿌릉이가 엄마한테 와줘서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 너를 만난 건 행운이야.
⁺부릉 말레오:인도네시아 슬라웨시에 서식한다. 말레오 새라는 뜻. 행운을 가져다 준다고 알려졌다.
알을 땅 속에 묻어 지열로 부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