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구?
진주로 옮겨 온 지 여러 달이 흘렀다.
소율은 새로 연 명월관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매일같이 분주했다.
그 틈에 어린 춘식은 언니 소현의 손에 맡겨졌다.
소현은 하숙집을 운영하며 많은 학생들과 책을 벗 삼아 사는 여인이었다.
방이 수십 개에 달할 만큼 큰 집이었으므로 일손은 늘 모자랐다.
그래서 춘식은 새벽부터 물을 길고 밥을 짓고 심부름을 하며 하루를 보냈다.
“남자라면 부지런해야지. 게으름은 죄야.”
소현의 말은 언제나 매서웠다.
실수라도 하면 손찌검이 따라왔다.
밤이 되면 피곤에 절은 몸으로 공부를 해야 했고 책의 글자들은 눈앞에서 자꾸만 흩어졌다.
열두 살의 춘식은 점점 마음속에 질문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몸은 몸대로 힘들어 손바닥이 터지고 마음까지 아려왔지만 여전히 근면성실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속 질문들은 커져 갔다. 생각이 많아지는 나이.....
어쩌면 그것이 어른으로 가는 첫 문턱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던 어느 날 점심 무렵....
춘식은 식탁 위에 놓인 찬밥 한 그릇을 바라보다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마음이 답답하고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었다. 그의 엄마인 순이가 그리웠고 부산에 두고 온 그의 친구들이 그리웠다. 무작정 집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밀물처럼 밀려들어왔고 썰물처럼 그를 데리고 나갔다.
춘식은 어떤 짐도 없이 그저 진주의 집을 떠나 나왔다.
길가에는 여름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진주의 하늘은 낮게 깔렸고 멀리서 기차의 기적이 울렸다.
춘식은 그 소리를 따라 남쪽을 향해 걸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하나의 도시 이름이 희미하게 번져 있었다.
"부산..."
거기엔 어릴 적 친구들이 있었고 소율과 만철과의 따뜻한 추억도 남아 있는 듯했다.
그리움이 발이 되어 춘식은 그렇게 다시 부산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흔들리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부산역 근처에 도착한 춘식은 먼 길을 걸어오느라 신발 밑창이 닳아 있었다.
도시의 공기는 매캐했지만 그 속에 낯익은 냄새가 섞여 있었다.
바다의 소금기, 그리고 좋은 날의 기억.
춘식은 발길이 저절로 옛 동네로 향했다. 그곳은 예전과 다르지 않았다.
골목마다 아이들 웃음이 넘치고 저녁이면 연탄 냄새가 피어올랐다.
그 골목 어귀 춘식이 살던 집 바로 맞은편에는 늘 인심 좋은 할머니가 살고 계셨다.
할머니는 손주들을 여럿 돌보고 있었는데 그 손주들이 다 춘식의 또래였다.
그래서 예전엔 늘 그 집에서 같이 뛰놀며 자랐었다.
“아이고, 이게 누구야! 춘식이 아이가?”
할머니는 반가움에 눈시울을 붉혔다.
"야야 춘식이 왔다."
"뭐라고? 할머니? 춘식이~?"
"와~ 춘식이 오빠야~"
"춘식아~~ 춘식아~~~"
아이들은 맨발로 달려 나왔다.
아이들은 반가움에 서로 부둥켜안고 발을 굴렀다.
어찌나 반가워하든지 춘식은 절로 미소가 함박 지어졌다.
할머니는 흔쾌히 춘식을 반기시며 그 집에 머물게 했다.
아이들과 함께 맛난 것도 먹고 시장통 친구들을 만나러도 가고 바닷가도 거닐었다.
가는 곳마다 친구들이 반겨 주었고 춘식의 기쁨은 두 배 세배가 되었다.
하지만 마음 한켠에는 소율에 대한 걱정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러나 그 기쁨도 며칠뿐이었다.
앞집 할머니댁은 워낙 많은 식구가 있는 집이었고 또 모두가 다 힘든 시절이었기에 입 하나 늘어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며칠을 재워주던 할머니는 결국 망설이다가 마음 아프게 말했다.
“얘야, 내가 널 계속 데리고 있을 순 없단다. 와 니 어머니가 니 찾으러 안 오시나? 무신 일 있었드노?"
"어머니가 많이 바쁘십니더."
"더 여 있으면 좋겠지만서도 여가 형편이 좀 안 좋다 아이가.... 더는 재워주기 힘들겠구마.
저 위 절집에 아주 인심 좋은 분이 계신다 아이가. 니도 알제? 거 순돌이네 집에 좀 가 있그라. 니 어머니 오면은 거 있다 일러 줄꺼구마. 거기 가서 지내거라. 순돌이도 니랑 친했다 아이가. 반가워할 거다.”
그렇게 춘식은 절집으로 옮겨졌다. 그곳은 부처님 앞에서 향불이 늘 피어 있고 방 한쪽에선 스님이 계셨고
또 다른 방에선 사주와 작명을 봐주는 분들이 계셨고 또 다른 방에는 점을 보아주는 분도 계셨다.
춘식은 그곳에서 잔심부름도 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며 시간을 보냈다. 큰스님은 종종 아이들에게 글공부를 시키셨는데 학문을 열심히 해 온 춘식이인지라 한껏 기가 살아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곤 했다.
그런데 절에도 사정이 있었다.
절집을 거드는 집주인의 아이들이 많아서 이곳에도 오래 있기는 힘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힘든 시절이기도 하였고 남의 집 방문이 길어서야 될까? 사춘기 시절의 철없는 가출은 그 쯤 하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춘식은 허드레 일이 즐비한 소현의 하숙집으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춘식아~ 어머니 언제 오신닥 하드노?"
"어머니 바쁘십니더. 아마 여 못 오실 겁니다."
"맞나? 근디 우리 집 형편이 좀 그래가 여기 더는 못 있는다."
"에.... 알겠심더."
"안된다. 소율이 야 찾으러 올 꺼구마. 어느 애미가 자슥을 안 찾을 오겠나? 명월관 기생이 야 찾으러 올끼다. 델꾸 있어야 한다."
"그러면 요 밑에 동네 가정집에 가 있으면 어떻겠습니까?"
"그라믄 그라이소."
스님은 한숨을 쉬며, 결국 춘식을 아랫동네의 한 가정집에 맡겼다.
그 집은 평범했다.
아이들이 여럿이었고 아이들의 어머니는 시원한 성격의 대장부 같은 분이었다. 춘식은 또래 속에서 조금씩 웃음을 되찾아갔다. 저녁이면 함께 공기놀이를 하고 부산항에서 일하는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잠이 들곤 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던 어느 날..... 한 남자가 그 집 문 앞에 나타났다.
검은 중절모에 회색 양복, 눈빛이 묘하게 날카로웠다.
“이 집에 춘식이라는 아이가 있지요?”
낯선 사내가 낮게 물었다.
그의 이름은 제갈용(諸葛龍).
그가 어떤 이유로 춘식을 찾고 있는지 그날의 춘식은 아직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 만남이 훗날 그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꾸게 되리란 걸 그때는 몰랐다.
부산의 시장은 늘 분주했다.
바다에서 갓 잡아 올린 생선의 비린내, 갓 튀긴 어묵 냄새, 고무신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
그 모든 것이 뒤섞여 삶의 냄새로 가득했다.
그날도 시장 어귀엔 개구지게 뛰어노는 아이들이 있었다.
해 질 녘의 햇빛이 아이들의 볼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야~ 춘식이 니가 졌다. 그니까 노래해라."
"우와~ 오랜만에 우리 춘식이 노래 듣는 거야?"
사춘기의 춘식은 부끄러워 쭈삤댔다.
하지만 친구들과의 내기에서 졌기 때문에 안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춘식은 낯설지 않은 억양으로 어디선가 배워온 듯 또박또박 노래를 부르며 장꾼들의 시선을 모으기 시작했다.
짧은 노래였지만 여전히 듣는 이들의 마음을 붙잡는 힘이 있었다. 역시 춘식이였다.
아마도 외로움이 묻어 있어서였을까 그의 노래에는 늘 울림이 있었다.
그때, 우연히 그 길을 지나던 한 신사가 발걸음이 멈췄다.
그는 한때 철도 공무원이었다.
젊은 시절, 처남의 도움으로 부산역에 발령받아 근무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감당하기 어려운 도시의 속도는 그를 결국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경북 경상군 고산면 연흥동...
산그늘이 일찍 내려앉는 마을에서 그는 몇 해를 조용히 살았다.
하지만 세상일이 늘 그렇듯 부산에 일이 생겨 다시 내려오게 된 날이었다.
그냥 하루 머물다 갈 요량이었다.
그런데 시장 한복판에서 이상하리만큼 낯익은 목소리를 들었다.
그 목소리는 어딘가 맑으면서도 서글펐다.
제갈룡은 고개를 돌렸고 그곳에 춘식이가 있었다.
“얘야, 이름이 뭐라 했지?”
그가 조심스레 물었다.
“춘식이예요.”
소년은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그 짧은 대답 속에 담긴 맑은 눈빛 그 안에는 버려진 시간과 견뎌온 나날의 흔적이 있었다.
제갈룡은 그 눈빛을 보며 오래 묵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엇에 이끌린 건지 본인도 알 수 없었다.
"절 아세요?"
"아니.... 아니다."
"그런데 왜?" ('절 그렇게 보세요?')
"노랫소리가 좋아서....
잘 들었다. 얘야."
"고맙습니더."
춘식은 이내 친구들과 어울려 시장 어귀로 사라졌다.
그날 저녁, 제갈룡은 지인들을 만나 건하게 술을 마셨다.
"야야~ 아까 가 명월관 양자 아이가..."
"이름이...."
"춘식이다. 춘식이라 부르던데?"
"맞네... 춘식이..."
"역시 소율이 실력 대단 테...."
"그 스승의 그 제자락 카이..."
"근디 명월관 망한 거 아이가?"
"문 닫은 지가 언젠데..."
"명월관 식구들 부산 떴다고 하던데 자가 와 여깄노?"
"어려워지니까 버린 거 아이겠나..."
"아이다... 자식이고 제자 아이가.... 수제자를 누가 그리 쉬이 버리나?"
"그라믄 와 자는 여기 있노?"
"버린거라니까니..."
춘식이 떠난 시장통에서는 온통 명월관과 춘식이 얘기로 가득했다.
재갈룡은 조용히 그 얘기를 듣고 있었다.
그러고는 묻고 물어 춘식이를 찾아왔다.
"뉘 십니꺼?"
"지 모르시겠습니꺼?"
"아구야~ 철도 공무원 아니십니꺼?"
"오랜만에 뵙습니다."
"고향으로 가셨다더만 여긴 우웬 일이십니꺼?"
"볼일이 있어 왔습니더."
"그래예? 근디 우리집엔 무슨 일로?"
“이 집에 춘식이라는 아이가 있지요?”
"춘식이는 와 찾습니꺼?"
"춘식이를 제가 좀 데려갔으면 싶은데요?"
"춘식이를요?"
"딱 내 집 식구하면 좋겠다 싶어서....."
"식구요?"
"예, 식구요..."
('집안도 괜찮고 성품도 괴않고 울 춘식이를 양자 삼으려 그 카나?')
"춘식이하고 얘기 좀 해 보고 누님댁에 기별 드릴게요."
"그라이소... 연락 꼭 주십시오."
재갈룡은 그리 부탁을 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그날 밤....
"춘식아~ 니 명월관으로 안 돌아 갈끼가?"
사춘기의 춘식은 자존심 때문이어서인지 뻘쭘해서인지 아님 소현의 학대가 너무 끔찍했는지 단호하게 말했다.
"예, 안 갈 겁니다."
"참말로 가기 싫나?"
"안 갑니다."
"그라믄 다른 집 식구로 갈래?"
"예? 다른 집 식구요?"
"응, 다른 집 식구...."
다른 집 식구라는 말에 깜짝 놀라는 춘식입니다. 말은 가지 않겠다 하였지만 소율을 기다리고 있는 춘식입니다.
"다른 집에도 안 갈 겁니다."
"지는 혼자 살 겁니더?"
"아무랑도 안 살 겁니더?"
옆에서 듣고 있던 친구들이 거듭니다.
"춘식아~ 그 집 가라. 그 삼촌 대빵 좋다."
"맞다. 멋지고 착하고 똑똑하고..."
"아무튼 좋은 삼촌이다. 니 거 가면 호강하고 살끼다."
누가 뭐라 해도 춘식은 낯선 사람을 따라 또 어딘가로 가고 싶지 않았다. 잃어버린 엄마를 찾아야 한다는 마음과 소율과 만철을 기다리는 마음 때문에 그 어떤 곳에도 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여러 날이 지나도 소율은 오지 않았다.
친구들과 아주머니를 계속해서 춘식을 설득하였다. 처음에는 단호하게 가지 않겠다던 춘식은 점점 친구들의 달콤한 설득에 마음이 흔들렸다.
그러던 어느 날......
“춘식아~ 같이 가자. 내 고향으로.
니 어무이 찾는 거 내 도와줄 끼다.
니 어무이 찾으면 언제든 보내 줄 꺼구마.”
결정적인 제갈룡의 말에 춘식은 낯선 그를 따라 길을 나서고 말았다.
그 순간,
춘식이는 부산의 저녁 하늘을 올려다봤다. 붉은 노을이 시장 지붕 위로 흩어지고 있었다.
그 빛 속에서, 그는 어렴풋이 느꼈다. 어쩌면 자신의 인생이 이제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겠구나...
춘식이 부산을 떠나던 날....
부산 하늘 아래에는 세 사람이 함께 걷고 있었다.
순이와 소율 그리고 춘식....
그들은 서로 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며 서로의 길을 달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