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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올 이상은 Jul 30. 2023

세월을 거스른 구례

3월 말 1박 2일 일정으로 아내와 둘이 산수유 축제를 가기로 했다. 꽃구경도 꽃구경이지만 작년 이맘때쯤 목포 여행을 갔던 것이 좋은 추억이 되었고 그 후로 가보지 못한 볼거리가 많은 지방 도시를 시간 날 때마다 둘러보기로 했기 때문이다.

 출발 당일 기차를 타기 위해 새벽같이 일어나 서울역으로 향한다. 아침을 못 먹어 출출했지만 출발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아 해장국 대신 역사에서 도넛과 커피를 사들고 구례행 기차에 올랐다. 가는 내내 빗줄기가 오락가락했지만 우리의 여행 본능에는 문제 될 것이 일도 없었다.

 3시간을 달려 도착한 구례구역에는 추적추적 비도 내리고 축제 기간인대도 예상과 달리 사람도 많지 않았다. 역사 밖은 더 한산해서 승강장에 서있는 자동차 몇 대 외에는 버스 같은 대중교통도 기다리는 사람도 볼 수가 없다. 서울처럼 잘 짜인 대중교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첫 목적지인 섬진강까지 가기도 만만한 일이 아니어서 난감한 노릇이었다. 차를 가지고 왔어야 했나?라고 후회하고 있을 때 손님을 기다리는 택시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택시 기사와 몇 번 실랑이를 벌이고 그리 비싸지 않은 가격에 한나절 택시를 대절하기로 했다.

 첫 목적지인 섬진강변 벚꽃도로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첫 번째 내린 곳은 큰 두꺼비 동상이 보이는 강변 포인트였는데 섬진강의 유래를 지니고 있는 곳이었다. 은혜를 갚은 두꺼비를 상징해서 두꺼비 섬(蟾) 자와 나루 진(津) 자를 써서 섬진강이란다. 처음 듣는 섬진강에 얽힌 유래를 낯선 바닷가에서 주은 예쁜 조개 자랑하듯 누군가에게 자랑삼아 전하고 싶어 진다. 섬진 강변에는 어린 벚꽃 나무들이 길을 따라 몇 킬로씩 늘어서 있다. 예쁘긴 하지만 조성된 지 오래되지 않아서인지 도로를 장식하기엔 아직 힘겹고 소박해 보였다.

 남도대교만 넘으면 바로 화개장터가 나오는데 택시 기사는 차들이 달리는 도로 한 복판에서 굳이 우리를 내리라 하여 기념사진을 찍어준다. 그도 그럴 것이 남도대교는 얼마 되지 않는 강폭을 사이에 두고 한쪽은 전라도 말을 다른 한쪽은 경상도 말을 쓰는 구례군과 하동군을 잇는 다리이기 때문인 모양이다.

 다리 건너 화개장터는 노랫말처럼 하동과 구례, 광양과 산청 사람들이 다 모이나 보다. 사투리 잡담과 입씨름 흥정에 오순도순 왁자지껄 장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 구례에선 볼 수 없는 살아있는 풍경이다. 더군다나 화개장터 입구에는 기타를 맨 가수 조영남의 동상도 있어서 여기가 “화개장터입니다.”라고 소리치고 있는 것 같았다. 화개장터 인근 벚꽃거리도 구례와 달리 사람이 많기로는 마찬가지다. 도로 옆 커다란 카페만 보아도 그렇고 빽빽이 들어선 카페 주차장만 보아도 하동 쪽은 늘 사람들로 붐비나 보다. 길거리 벚나무도 수종 한 지도 백 년은 된 것처럼 나무 가지도 흐드러져서 한결 멋들어지고 바람에 날리는 벚꽃 잎은 마치 눈이 날리는 것처럼 보인다. 구례와 하동이 왜 이렇게 다른지 궁금해진다.

 벚꽃 구경을 마치고 쌍계사와 화엄사를 둘러보기로 한다. 쌍계사는 통일신라 성덕왕 때 지어진 절이고, 화엄사는 이보다 이른 백제 성왕 때 창건된 절이란다. 두 절은 창건된 시점은 다를지 모르지만 통일신라를 거치면서 중창, 중수되어 대규모 사찰로서 그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이 절들은 지리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산수와도 잘 어울리고 빼어난 풍모를 자랑한다. 그중에서도 쌍계사 금당은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고즈넉해서 금당 툇마루에 걸터앉아 건너 산 풍경만 응시만 해도 저절로 하늘과 소통이 되고 득도할 것만 같은 곳이다. 또 화엄사의 각황전은 단청도 칠하지 않았지만 웅장하기가 이를 데가 없고 대웅전 옆에 핀 홍매화는 열반에 이르는 안내자처럼 대웅전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지켜주고 있는 듯했다.

 화엄사를 나와 향한 곳은 구례 운조루 고택이었다. 99칸으로 지은 한옥인데 낡은 대청이며 뒤틀린 문짝 여기저기에서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운조루 대문 앞에는 커다란 통나무 쌀뒤주가 있고 그 아래에 주먹 하나 들어갈 구멍이 있는데 뒤주에는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필요한 사람은 누구라도 문을 열고 쌀을 가져갈 수 있다'라는 뜻으로 그 옛날 집주인의 넉넉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택시 기사님 덕에 특별대우를 받아 사랑채까지 안내되었고 집주인이 연신 따라주는 녹차를 마시며 도덕경과 논어 맹자를 넘나드는 설교를 듣기도 했다. 잠시였지만 99칸 고택에, 논어 맹자를 들으니 잠시 조선시대를 다녀온 듯 착각에 빠져들기도 했다.

 이곳저곳을 돌아보니 벌써 저녁때가 다 되어 간다. 마지막 코스로 택시 기사님은 우리를 산수유 마을로 안내해 주었다. 반곡회관을 지나 상위마을로 산수유마을 지나 반석골 골목 구석구석을 차로 안내해 주니 30분도 안 걸려 산수유 축제를 다 구경한 것만 같았다. 이 마을은 한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마을로 선정된 곳이어서 내일은 걸어서 마을의 속살을 속속들이 관찰하리라 기약하며 오늘은 이만 호텔로 돌아가 쉬기로 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니 다시 비가 오기 시작한다. 우산을 받쳐 들고 어제 안내받은 코스를 거꾸로 돌기로 한다. 처음 들어선 대음길에는 집집마다 대문도 없고 담장도 나지막한 데다 마당에는 연노란색으로 흐드러진 산수유가 보기 좋게 시골집들을 장식하고 있었다. 좁은 골목을 따라 이리저리 돌다 보니 결국 개천을 건너 목재 다리를 이어 만든 산수유꽃길에 다다른다. 우리는 다시 그곳부터 상위마을까지 연노랑 꽃길을 따라 개울도 만나고, 정자도 만나고, 사람들과 섞이며 사진도 찍고 웃기도 하였다. 꽃 축제를 하면 어디나 사람으로 붐비는데 이곳 구례는 사람들도 드물고, 비도 오고, 조용하고, 고즈넉한 것이 과거를 걷고 있는 듯하다.

  시간이 꽤 흘러 돌아올 시간이 되어 가자 우리는 물어물어 구례구역 행 차편을 알아내고 시외버스 정류소를 찾아낸다. 정류소에는 70년대를 연상시키는 이발소와 마을회관이 있고 자그마한 카페도 보인다. 카페 안에는 중절모를 멋들어지게 쓴 중년의 여인이 자신을 지리산 가수라고 소개하며 주문을 받는다. 둘러보니 가수임을 증명하듯 벽에는 기타를 맨 여주인의 사진도 붙어있어 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통기타를 치며 70년대 유행하던 포크송을 불러준다. 순간 학창 시절 통기타 다방에서 미팅하던 장면이 떠오른다.

 구례 여행은 참 묘한 구석이 있다. 한적한 기차역, 간간이 차만 지나가던 섬진강 벚꽃 길, 산수유가 흐드러진 좁은 마을길, 낮은 담장의 반석골 골목길, 시외버스 정류소의 카페까지 구례의 모든 것들이 오래된 영화를 보는 듯 삼사십 년 세월을 거슬러 놓는다. 돌아가는 기차에서 아내는 이번 여행이 좋았는지 흐뭇하게 웃으며 언제가 한 번 더 오자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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