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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세베리아 Oct 30. 2022

5. 중국+추억 여행+해천만

우리는 중국 여행중

중국으로의 탈출을 실패한 나는 한동안 망망대해 표류한 배안에 혼자 떠있는 기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국제학교 교장선생님으로부터 뜻밖의 메일을 받게 되었다.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부딪혀 보지 않은 현실에 미리 겁먹지 말고 한번 도전해 보는 것도 의 인생에 큰 경험이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또 위해에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많은 싱글들이 만나 좋은 인연을 맺고 있다고 덧붙여주셨다.


나는 그날 밤 부모님 앞에서 국제학교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온 메일을 크게 낭독해주었다. 부모님이 반짝거리는 내 눈과 설렘에 가득 찬 내 목소리를 느끼지 못하셨을 리가 없었다. 드디어 아빠의 얇디얇은 돌보다 무거운 그 입술사이에서 긍정의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가고 싶니?'라는 그 말.... 


"엄마, 아빠. 두 분의 기대에 못 미친 미련한 딸이지만 두 분의 불화, 술주정, 엄마의 방패 역할 저도 이제 지쳐요... 엄마가 그랬죠? 자식이니깐 당연한 거라고요. 하지만 이제 저도 30년 가까이했으니 그만할래요.  제가 떠난다고 해서 더 행복해지리라는 확신은 없어요. 하지만 이제는 사회에 나가 제가 어떤 쓰임이 있는지 보고 싶어요." 아빠는 한 손으로는 내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크게 내 손을 두 번 쓸어내려주셨다. "그래...  고생했다." 그로부터 정확히 2주 후 나는 중국 위해로 가는 비행기에 올라탔다.


재스민과 윈디는 나의 새 출발을 크게 축하해주었다. 내가 가는 학교는 유치원부터 고등학교 커리큘럼까지 있는 큰 학교였고 재능기부 봉사활동 등 다양한 행사를 통해 학생을 심신을 건전하게 수양해 널리 세상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기본 모토였다. 


나는 설렘 반 두려움 반으로 그렇게 중국의 국제학교에서 내 인생 29살 가을을 맞이했다. 선생님들은 내 예상과는 달리 대부분 40대 후반 50대 중반 이셨고 그래서 그런지 학생들은 내가 첫 수업을 들어갔을 때 환호성을 질렀으며 사진 요청도 하였다. 나는 그 환대가 나쁘지 않았으나 또래 선생님들이 별로 보이지 않아서 실망이 컸다. 그중 30대 후반 노총각 체육 선생님이 계시긴 했는데 본인의 잘난 스펙과 동안의 얼굴로 유독 어린 여자들만 좋아한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국제학교여서인지 인종이 다른 커플이 다수 있다는 것이 매우 신선한 충격이었으며 '나에게도 혹시 영국 혹은 이탈리아 아니면 캐나다 남자 친구가 생기지 않을까?'라는 기대에 매주 월요일 조회시간에는 국제부 선생님들의 얼굴을 힐끔힐끔 쳐다보기도 하였다. 


학교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질 때 즈음  영국 커리큘럼을 쓰고 있던 국제학교에는 일주일간의 크리스마스 방학이 찾아왔다. 나는 29살의 크리스마스를 쓸쓸히 보낼 수 없다는 생각을 했고 그 시각 나와 같은 생각을 한 윈디와 재스민은 학원 방학 날 청도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나는 그녀들이 온나는 소식에 당장 버스로 4시간을 달려 하루 전날 청도 Old Church라는 숙소에 도착했다.


하지만 윈디와 재스민의 비행기가 출발하는 그날 늦은 오후  하늘에서는 비바람이 청도 잔교의 바닷물을 집어삼퀴듯 몰아쳤고 불안한 마음에 비행기가 잘 도착했는지 애꿎은 항공사 직원을 붙들고 어떻게 좀 알아봐 달라고 애걸복걸 울부짖었다.


바로 그때 "클라라!~"라고 나를 부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왔다! 비행기가 무사히 청도 국제공항에 착륙을 했다!.' 우리는 마치 10년을 떨어졌다가 만난 가족처럼 동물의 왕국이나 아마존에서 나올 법한 이름 모를 파충류처럼 서로를 부둥켜안고 폴짝폴짝 뛰며 꺅꺅 소리를 질러댔다.


Old Church 숙소는 청도의 오래된 쯔모루 재래시장 바로 앞에 위치해 있었다. 100년 가까이된 교회 건물을 개조해서 만든 저렴이 숙소였지만 지하의 바는 모던하고 세련되게 꾸며져 있어 칵테일 한잔으로 기분 내기 충분한 힙한 장소였다. 우리는 지난 여름날의 그 인기를 또다시 실감하며 청도의 맥주공장부터 시작해 5.18 광장 그리고 잔교, 훠궈 유명 레스토랑에서까지 환대를 받으며 돌아다녔다.


그렇게 12월 31일 29세의 마지막 날이 오고야 말았다. 1월 1일 새벽 비행기로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던 재스민은 나에게 한 관광 팸플릿을 보여주며 여기에 가보고 싶다고 제안했다. 해천만이라는 온천이었다. 르네상스식 건물로 지어진 해천만은 거대한 호텔과 쇼핑몰도 함께 소유하고 있는 규모가 제법 큰 리조트였다. 큰 부지 때문인지 도시 중심지에서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우리는 바로 해천만 온천으로 떠났다. 오후 늦게 도착한 그곳은 기대 이상으로 크고 화려한 곳이었다. 그렇게 이곳저곳을 구경하며 도착한 로비에서 우리 셋은 뜻하지 않은 난관에 부딪혔다. 오후 늦은 시각 해천만에 들어는 왔으나 다음날 새벽에 공항 쪽으로 가는 벤이나 택시 예약이 모두 마감된 상태라는 것이다.


영어가 서툰 온천 직원과 중국말이 서툰 우리가 프런트 데스크에서 쩔쩔매고 있자 매니저라는 키가 큰 미소년이 청남색 유니폼을 입고 우리 앞에 와 인사하였다. 그는 일단 한국에서 우리 온천을 알고 찾아와 주어서 감사하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비행시간까지 시간이 많지 않으니 우선 들어가서 온천을 즐기면 본인이 매니저로서 책임지고 차량을 마련해 놓겠다고 했다.


나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세상 낙천적이며 긍정적인 윈디와 재스민은 그의 말을 들은 즉시 온천장을 향해 내달음질을 쳤다. 그녀들의 밝은 기운에 내 걱정도 잠시 후 사그라들었고 우리는 비키니로 갈아입고 실내 이벤트탕을 시작으로 실외 온천탕에서 온천욕을 즐겼다. 늦은 시각 손님이 별로 없어서인지 아니면 비키니를 입은 우리 모습이 예뻤는지 남자 안전 요원들 3~4명은 시설을 안내해주면서 우리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사진도 찍어주셨다.


야외탕은 특히나 휘황찬란했다. 거대한 석조 아치형 다리 아래로 따뜻한 탕들이 이곳저곳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안전요원들은 우리가 탕에서 나올 때마다 추울까 봐 거대한 흰 타올로 우리 몸을 감싸주었고 마치 우리가 온천을 통째로 빌린 VVIP들 인양 에스코트해주었다.


이 온천이 한국과 또 다른 점은 아늑한 소파 휴게실을 보유하고 있단 점이었다. 휴게실에는 개인 전용 티브이가 달린 거대한 리클라이너 쇼파 수십 개가 각 맞춰 정렬되어 있었다. 셀프바에서 과일과 차를 가지고 와서 쉴 수가 있는 공간이었다. 우리는 따뜻한 차로 노곤해진 몸을 포근한 소파에 기댐과 동시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렇게 잠이 들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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