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겨울의 한복판, 아침 창문을 열다 문득 로버트 브라우닝의 시 〈피파의 노래(Pippa Passes)〉가 떠올랐습니다. 감수성 예민하던 사춘기 시절, 이 시를 처음 읽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던 기억이 납니다.
계절은 봄,
하루 중 아침.
아침 일곱 시,
언덕에는 진주 이슬 맺히고
종달새는 창공을 날고,
달팽이는 가시나무 위에.
신은 하늘에 계시니,
이 세상 모든 것이 평온하도다.
중학교 당시 제게 등굣길은 낭만과는 거리가 먼 '생존 게임'이었습니다. 먼지 풀풀 날리는 길을 한 시간씩 걸어야 했고, 무거운 책가방을 든 채 학교에 도착하면 벌써 땀범벅이 되곤 했지요. 그런 척박한 일상 속에서 만난 이 시는 얼마나 청량하고 곱던지요. 아침마다 지저귀는 이름 모를 새가 모두 종달새처럼 느껴졌고, 풀잎에 맺힌 이슬 한 방울도 진주처럼 보였습니다.
어젯밤 소복이 내린 눈 덕분에 창밖 세상은 고요하고 평온합니다. 한때는 눈 예보에 진저리 치며 출근을 걱정하던 직장인이었지만, 이제는 따뜻한 차 한 잔과 함께 눈이 주는 풍경을 즐길 수 있게 되었으니 참으로 감사한 호사입니다.
이 시의 주인공인 '피파'는 방직공장에서 일하는 가난한 소녀입니다. 일 년에 단 하루뿐인 휴가 날, 그녀는 동네 길을 걸으며 흥얼흥얼 노래를 부릅니다. 밤이 깊었을 때 피파는 소중한 휴가를 헛되이 보낸 것 같아 후회하며 잠자리에 들지만, 그녀가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습니다.
비밀과 아픔, 때로는 음모와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던 마을 사람들이 무심코 들려온 피파의 순수한 노랫소리에 마음을 돌리고, 반성하며, 다시 삶을 마주할 용기를 얻었다는 사실입니다. 한 사람을, 혹은 세상을 바꾸는 힘은 거창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순수한 영혼이 내뱉는 작은 말 한마디, 스쳐 지나가는 다정한 인연에 있다는 진실을 시는 말해줍니다.
원문에서 "All's right with the world"라고 표현했듯, 세상의 모든 것이 제자리에서 순리대로 돌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괜찮다'고 느낍니다. 우리 또한 피파처럼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의 세상을 따뜻하게 바꾸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설령 내일이면 다시 고단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지라도, 우리는 봄이 오면 다시 피파의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
▲ "매일 마주하는 식탁 위 작은 티매트 한 장이 일상의 평온을 지켜주듯, 우리도 서로에게 따뜻한 차 한 잔 같은 존재가 되었으면 합니다."
창밖 공기가 매서운 날입니다. 오늘은 우리 서로에게 따뜻한 온기를 전하는 '피파'가 되어보면 어떨까요? 당신의 무심한 다정함이 누군가에게는 오늘을 살아갈 커다란 희망이 될지도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