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일기] 프롤로그. 퇴사 후 순례길에 오르다

by 강라곰

퇴사를 결심한 순간부터 마음은 붕 뜨기 시작했다. 여행에는 그토록 관심 없었는데 남들이 올린 여행 사진에 계속 눈길이 갔다. 여행보다도 탁 트인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많고 많은 여행지 중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을 택한 이유였다. 순례자들을 위한 알베르게는 숙박비가 저렴해서 퇴사 후 돈 없는 백수에게 알맞은 여행지였기도 했다. 마침 디지털 카메라를 마련해 사진에 흥미를 가지던 참이었다. 원정 출사라. 더 가슴이 뛰었다.

퇴사 후에는 여행 준비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처음에는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버리고 진짜 순례자처럼 다녀보자 했지만 준비 시간이 길어질수록 여행 비용과 짐은 점점 커져갔다.

여행 전날까지 짐을 줄여봤지만 아직 온전히 버리지 못한 10킬로의 탐욕을 등에 지고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파리로 향하는 14시간 비행을 위해 공항에서 한식을 든든하게 먹어뒀다. msg 가득한 고향의 맛 순두부찌개는 순례길 내내 생각이 날 것 같다. 혹시나 비행기를 못 타면 어쩌나 하는 불안함에 인천공항에 일찍 도착하다 보니 대기시간이 길어졌다. 탑승구 앞좌석에 앉아 핸드폰 배터리를 아끼기 위해 멍을 때리고 있었는데 등 뒤에서 프랑스어가 들려왔다. 그러다 별안간 짧은 감탄사와 함께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동전은 엄청난 스핀을 하면서 포물선을 그리더니 내 발밑에서 회전을 멈췄다. 뒤를 돌아보니 프랑스인인 듯한 남자는 동전을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고, 그의 친구들은 그 모습을 보며 낄낄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아무 말 없이 동전을 내밀었다. 남자는 내가 다가온 지도 모르고 계속 눈으로 바닥을 훑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쓰는 영어도 프랑스어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 한국말로 “여기...” 하며 동전을 더 가까이 내밀었다. 그제야 일행 중 한 명이 나를 발견하고 동전 주인에게 내가 왔음을 알렸다. 동전을 받아둔 동전 주인은 “감사합니다.”라고 또박또박 한국어로 고마움을 전했다. 난 대답 대신 미소를 지으며(안 지었을 수도 있다) 자리로 와 앉았다. 순례길에서 외국인을 만나면 웃으면서 그 나라 언어로 인사하고자 마음먹었는데 한국에서도 못하는 짓을 외국에서 할 수 있을 리 없다. 한 달 동안의 순례길이 눈앞에 그려지는 순간이었다. 내가 그렇지 뭐. 방금까지만 해도 오랜만의 여행에 꽤 들떠있었는데 푹 가라앉고 말았다.

14시간의 비행은 생각보다 더 지루하고 힘들었다. 계속 비행기 안을 돌아다니고 끊임없이 서비스를 하는 승무원들이 존경스러워지는 시간이었다. 우리나라 국적기라 한식이 나오는 건 좋았는데 장기 비행에 무지해 창가 쪽에 앉는 바람에 불편함이 많았다. 돌아오는 비행기는 복도 쪽 자리에 앉고자 마음먹었다.

순례길 동안 마음을 비우고 속세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었지만 그 결심은 오래가지 않았다(이미 짐에서부터 속세와 많이 벗어나 있었다). 파리 가는 비행 내내 나는 속세의 음식을 먹으며 예능을 보고 뒹굴거리고 싶은 욕구에 시달렸다.

장기 비행을 마치고 공항 바로 앞에서 정잘체 택시를 탔다. 창밖으로 풍경을 보는데 인천과 다를 바 없어 내가 진짜 파리에 온 게 맞는지 잠시 헷갈렸다. 파리 중심구에 도착해 멀리서나마 에펠탑을 보니 진짜 파리가 맞구나 안심이 되는 한편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평생 아시아 국가에서 벗어본 적 없는 내가 영어권 국가도 아닌 프랑스에 오다니. 내일은 심지어 프랑스를 벗어나 스페인 국경과 맞닿아있는 먼 시골마을로 가야 한다. 택시는 미리 예약한 호텔 앞에 멈춰 섰다. 호텔에 들어가자마자 와인이 가득한 바가 보였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호텔 프론트라고 할만한 곳은 없었다. 어리바리하게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는데 직원 같아 보이는 남자가 다가와 체크인할 거냐고 물어보았다. 내가 그렇다고 하자 남자는 바 앞에 있는 작은 테이블로 나를 안내했다. 테이블에는 노트북 두 대와 각종 서류들, 카드 단말기 뿐이었다. 이곳이 바로 체크인을 하는 사무 작업 공간인 듯했다. 무척이나 캐주얼한 느낌의 호텔이라 당황스러웠지만 어찌 됐든 무사히 체크인을 끝냈다. 카드 키를 받고 방으로 가 바닥까지 긁어낸 에너지로 샤워를 한 뒤 바로 침대로 뛰어들었다. 짐은 내일 일찍 일어나서 싸자. 나는 새벽 5시로 알람을 맞춰놓고 쓰러지듯이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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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