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포파왜병장, 정운 장군의 죽음, 김시민 장군의 죽음
二十七日 晴 與嶺右水伯同議 移舟到巨濟漆乃島
熊川倅李宗仁來話 聞斬倭三十五級云
暮渡濟浦 西院浦 則夜已二更 宿 西風吹冷
客思不平 是夜 夢亦多亂
오늘은 영남 수영의 수군들과 함께 거제의 칠내도로 배를 옮기는 문제를 논의했고,
결국 모두의 뜻을 모아 배를 칠내도(칠천도)로 옮겼다.
웅천에서 올라온 이종인이라는 관리가 찾아와 전한 말에
왜적 35명의 목을 벴다고 한다.
해가 저물고, 우리는 제포(진해 제덕동)를 거쳐 서원포(진해 원포동)까지 배를 타고 나아갔다.
밤은 이미 깊어, 이경(밤 9시에서 11시쯤)이 되어서야 겨우 머물 곳을 찾을 수 있었다.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뼛속까지 차가웠다.
잠자리에 들었지만 마음이 불편해 쉽게 잠들지 못했다.
결국 그 밤, 꿈까지도 어지럽고 뒤숭숭했다.
二十八日 晴 曉坐記夢 則初似兇而反吉 到加德
새벽녘, 잠에서 깨어 앉은 채로 어젯밤 꿈을 곱씹어본다.
꿈은 처음엔 불길한 듯 보였으나, 곰곰이 되새기니 오히려 길한 징조로 여겨졌다.
나라의 앞날도, 내 앞길도 어둡기만 한 줄 알았는데
하늘이 아직은 등을 돌리지 않았다는 뜻일까.
모든 것이 끝난 듯 느껴졌던 어제의 밤보다,
오늘 아침은 한 가닥 희망이 마음 깊은 곳에서 피어오른다.
그리하여 나는 군사를 이끌고 가덕도에 도착했다.
한 치의 방심도 없이, 그러나 마음은 어제보다 단단했다.
나라를 위한 길이라면, 나는 내 모든 것을 내어놓을 준비가 되어 있다.
1592년 8월 29일부터 1593년 2월 1일까지,
『난중일기』에는 약 다섯 달간의 기록이 비어 있습니다.
그 공백은 단순한 누락이 아닙니다.
이순신 장군께서 가장 치열한 전투를 지휘하며,
일기 대신 실전을 선택하신 시간입니다.
그 대신, 장군은 이 시기의 전투 상황을
『부산포파왜병장』이라는 공식 보고서에 담아 선조 임금께 올렸습니다.
장림포, 화준구미, 다대포, 서평포, 절영도, 초량목, 그리고 부산포 해전까지
9월 1일까지 이어진 작전과 전투의 전말,
병사들의 공훈과 희생, 적의 움직임과 전략적 판단이
모두 이 한 편의 장계 속에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삼가 아뢰옵니다, 전라도 좌수사 이순신이옵니다.
앞서 경상도 해안을 침범한 왜적을 세 차례나 크게 격파한 결과, 이제 가덕도 서쪽에서는 왜적의 모습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각 지역에서 패하여 흩어진 적들이 점점 남쪽 부산 쪽으로 몰려 내려오고 있어, 이번 기회를 틈타 수군과 육군이 힘을 모아 적을 완전히 몰아내려 합니다.
이에 전라도 좌수영과 우수영의 전투선 74척과 보조선 92척을 합쳐 대규모의 함대를 구성하고 철저히 정비한 뒤, 지난 8월 초하루 본영 앞바다에서 진을 갖추고 출정을 준비했습니다.
이 무렵 경상우도의 순찰사가 육지에서 보고하길, 양산과 김해 지역에서 적들이 낮에는 숨어 있다가 밤에만 움직이며 도주 준비를 하고 있다고 전해왔습니다. 실제로 양산과 김해에서 내려온 적의 배에는 도주할 짐이 가득 실려 있었습니다.
이에 지난 8월 24일 경상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출정하고, 방어를 담당한 장수 정걸도 함께하여 남해의 관음포에서 밤을 지낸 뒤, 25일 사량도 앞바다에서 경상우수사 원균과 만나 적의 동태를 논의했습니다. 이후 당포에서 하루를 더 머물고, 26일에는 폭풍우로 어려움을 겪다가 밤에 몰래 거제도를 거쳐 웅천의 제포와 원포로 이동하였습니다.
8월 28일 아침, 육지의 정찰병이 보고하기를, 고성·진해·창원의 병영에 머물던 왜적이 모두 도주했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분명 적이 우리 수군의 위엄에 겁을 먹고 배로 달아난 것이라 판단하여, 곧바로 양산과 김해 앞바다로 향했습니다.
창원의 구곡포에 살던 포로 한 명이 탈출하여 와서 말하길, 김해강에 머물던 왜선들이 몰운대 앞바다로 급히 도망쳤다고 했습니다. 저는 즉시 가덕도 북쪽 해안에 배를 숨기고, 방답첨사 이순신과 광양 현감 어영담을 보내 적의 움직임을 살폈습니다. 정찰 결과, 적의 작은 배 4척만 몰운대를 지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천성과 선창 쪽에서 밤을 보냈습니다.
장림포해전 10승 1592년 8월 29일
8월 29일 새벽, 다시 양산·김해강 앞바다로 향하던 중 동래의 장림포에서 왜적 30여 명이 탄 배를 발견했습니다.
적들은 우리를 보자마자 배를 버리고 도망쳤으며, 즉시 경상우수사가 적선을 모두 들이받아 불태웠습니다.
이때 제 휘하의 우후 이몽구가 적선 한 척을 깨뜨리고 적 한 명의 목을 베었습니다.
그러나 강 입구가 좁아 큰 배가 진입하기 어려워 가덕도로 물러나 하루를 보냈습니다.
9월 1일, 다시 출정하여 몰운대 근처에서 심한 동풍과 파도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계속 전진하여 화준구미·다대포·서평포·절영도에서 차례로 왜적의 배를 모두 불태우고 적의 무기와 물자를 철저히 소각했습니다. 이로써 적들은 산 위로 도망쳤고, 남은 흔적도 철저히 소탕하였습니다.
이어 부산 앞바다를 정찰해 보니 적선이 무려 500척이 넘게 모여 있었고,
그중 일부는 우리를 위협하듯 전진해 왔습니다. 이에 경상우수사 이억기, 전라우수사 원균과 협의하여, 지금 물러나면 적들이 더욱 기세를 부릴 것이므로 반드시 총공격을 해야 한다고 결정했습니다.
이때 죽도만호 정운, 군관 이언량, 방답첨사 이순신, 순천부사 권준, 낙안군수 신호 등 제 장수들이 용감히 돌격하여 선두의 왜선 4척을 불태웠고,
이에 힘입어 모두가 맹렬히 공격하여 하루 종일 싸워 적선 100여 척을 완파했습니다.
적들은 산 위에서 화살과 총탄을 쏟아부으며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결국 기세가 꺾여 산속으로 숨어버렸습니다.
이 과정에서 선봉에서 싸우던 정운이 적의 철환을 맞아 전사했고,
여러 장병들도 전사하거나 크게 다쳤습니다. 이에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전사자들을 예우하여 고향에 돌려보냈습니다.
적들은 부산성을 요새화하고 오랫동안 머물 계획으로 많은 집을 짓고 성곽과 주변에 군락을 형성했습니다. 다시 공격하려 했으나, 날씨와 지형 문제로 함선들이 부서지는 등 어려움을 겪어 병선을 수리하며 다시 육군과 함께 공격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번 부산 전투는 앞선 모든 전투 중 가장 큰 성과였으며,
적의 본거지 470여 척의 적선을 상대로 승리하여 왜적의 기세를 크게 꺾었습니다.
다만 급히 적선을 불태우느라 적의 머리를 베지 못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저와 제 장수들은 다시 한번 힘을 모아, 적을 완전히 몰아내고 백성을 지키겠다는 각오로 임하고 있사오니, 전하께서 굽어 살펴주옵소서.
전라도 좌수사 이순신, 삼가 아뢰옵니다.
이 글은 ‘부산포파왜병장’의 전체 원문을 바탕으로 정리한 요약본입니다.
원문은 매우 길고 세밀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1592년 8월 29일부터 9월 2일까지 이순신 장군이 치른 해전들,
특히 장림포, 화준구미, 다대포, 서평포, 절영도, 초량목, 부산포 해전까지의 과정이
치열하고도 치밀하게 보고되어 있습니다.
이 글은 그 원문을 현대어로 쉽게 풀고,
그 핵심 내용을 충실히 요약한 해설입니다.
화준구미 해전 11승 1592년 9월 1일
다대포해전 12승 1592년 9월 1일
서평포해전 13승 1592년 9월 1일
절영도해전 14승 1592년 9월 1일
초량목해전 15승 1592년 9월 1일
제증참판정운문 – 현대어 의역
어허, 인생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고 죽고 사는 데는 반드시 하늘의 뜻이 있으니, 사람이 한 번 세상에 나서 죽음에 이르는 것이야 무엇을 아까워하겠는가.
그러나 오직 그대의 죽음 앞에서는 가슴이 미어지고 마음이 찢어지는구나.
나라가 불행하여 섬 오랑캐가 밀어닥쳐 영남의 성들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흔들릴 때, 몰아치는 그들의 칼날 앞에 한양은 하룻밤 사이에 적의 소굴이 되고 말았구나.
임금님께서는 천리 먼 관서로 어가를 옮기시고, 북녘 하늘을 바라보는 우리 심정은 애가 끊어지고 간담이 찢어지는 듯하였다.
이 위급한 나라의 위기 속에서, 나는 둔하고 재주 부족하여 적을 칠 방도를 찾지 못할 때마다, 그대는 나와 함께 의논하며 밝은 빛처럼 어둠을 헤쳐 주었다. 그대와 계획을 세우고,
배를 나란히 하여 바다로 나갈 때면 그대는 언제나 죽음을 무릅쓰고 앞장섰고, 왜적 수백 명이 그대의 칼 아래 피를 흘렸으니, 검은 연기는 근심의 구름 되어 동녘 하늘을 덮었었다.
네 번이나 크게 이긴 그 싸움, 그 공을 어찌 내가 혼자 이룰 수 있었겠는가. 이제 곧 나라의 종사를 되찾는 꿈이 눈앞에 있었건만, 아아, 어찌 하늘이 무심하여 그대를 적의 포탄 아래 쓰러뜨렸는가.
그대는 돌아오는 길에 다시 싸워 원수를 갚겠다 맹세했건만,
날은 어두웠고 바람은 거칠어 우리의 소원을 끝내 이루지 못했으니,
그대의 죽음 앞에 평생 가슴에 맺힌 한이 이보다 더 클 수 있겠는가.
여기 이렇게 글을 쓰는 내 가슴에도 칼로 도려내듯 아픔이 깊구나.
내 마음을 온전히 알고 믿던 이는 오직 그대뿐인데, 이제 나는 누구와 이 뜻을 함께하리오.
진중의 모든 장수들 또한 그대를 잃은 슬픔에 피눈물을 흘리나니,
하늘이 어찌 이리도 무심한지, 덕은 높되 지위는 낮았던 그대, 나라가 불행하여 군사와 백성들의 복마저 없으니, 그대와 같은 충의의 사람, 고금에 몇이나 있었으랴. 그대는 비록 이 세상을 떠났으나, 나라를 위해 던진 그 몸은 죽어서도 살아 있음을 나는 아노라.
아아 슬프다. 이제 이 세상에 누가 내 마음을 알아줄 수 있겠는가.
그대가 없는 밤은 너무나도 깊고 외로워, 한 잔의 술에 그대를 향한 내 정을 담아 올리노라.
어허, 슬프고 슬프구나.
1592년 가을, 일본군은 부산 앞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크게 지고 말았습니다. 바닷길을 통해 조선의 곡창지대인 호남을 차지하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일본군은 이번엔 육지 길을 뚫어 호남으로 들어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호남으로 가는 길목에는 진주성이 있었습니다. 일본군은 진주성을 무너뜨리면 호남은 손쉽게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3만이나 되는 병력을 모아 진주성을 공격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진주 목사였던 이경은 일본군이 온다는 소식을 듣자 겁이 나서 부하들을 데리고 지리산으로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진주는 지킬 사람이 없어 위기에 빠졌습니다. 이때 김시민이라는 장수가 대신 목사가 되어 진주성을 지키기로 했습니다.
김시민은 병력을 모아 진주성을 튼튼히 지키고, 백성들에게 군복을 입혀 병사가 많은 것처럼 보이도록 했습니다.
또 각지에 있는 의병장들에게 도움을 청했고, 의병장 곽재우와 최경회가 진주성 외곽에 진을 치고 일본군의 뒤를 위협했습니다.
마침내 10월 6일, 3만 명의 일본군이 진주성 앞에 도착했습니다. 일본군은 조총을 쏘며 진주성을 공격했지만, 김시민과 성 안의 병사들은 대포와 화살로 이를 막아냈습니다.
밤이 되자 곽재우의 의병들은 뒷산에서 횃불을 흔들고 피리를 불며 일본군을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다음 날 일본군은 성 주변 마을들을 불태우며 공격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면서 잡아온 조선 아이들을 시켜 진주성 사람들에게 항복하라고 외치게 했습니다.
병사들이 분노했지만, 김시민은 절대 대응하지 말라고 단단히 명령했습니다.
8일 아침, 일본군은 더 거세게 진주성을 공격했습니다. 성이 거의 함락될 뻔했지만 김시민은 돌과 온갖 물건을 던지며 끈질기게 방어했습니다. 의병들의 응원과 지원 덕에 일본군은 계속 실패했습니다.
일본군은 작전을 바꿔 사다리와 대나무 방패를 이용해 성벽을 넘으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결국 일본군은 꾀를 내어 거짓으로 물러가는 척했지만,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한 한 아이가 일본군이 총공격을 준비한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10월 10일 새벽, 일본군은 모든 힘을 다해 진주성을 공격했습니다. 외벽이 뚫리고 위기의 순간이었지만, 김시민과 병사들은 죽을힘을 다해 싸웠습니다. 이때 일본군의 총탄에 맞아 김시민이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김시민을 대신한 부장 이광악이 끝까지 싸움을 지휘했고, 결국 일본군은 진주성을 점령하지 못한 채 물러갔습니다.
진주성 사람들은 끝까지 버텨냈습니다. 하지만 김시민은 끝내 눈을 뜨지 못했고, 며칠 뒤 숨을 거두었습니다.
진주성에서의 이 승리는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김시민과 진주 백성들, 그리고 각지에서 모인 의병들이 하나가 되어 나라를 지켜낸 이야기입니다.
진주성 1차 전투
진주성 조선군: 3,800명 (+500명 추정)
vs
왜군 3만 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