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3년 2월 3일

계사일기 (1593년) 1593년 1월 평양성 수복

by 지온x지피

初三日戊子 晴 諸將准會 而寶城未及 東上房出坐 與順天․

樂安․光陽論約有時 是日嶺南移來 向化金浩乞 羅將

金水男等 置簿格軍八十餘名 告以逃去 多受賂物不捉來 故

潛遣軍官李鳳壽鄭思立等 搜捉七十餘名 分各船

浩乞金水男等 卽日行刑 自戌時 風雨大作 諸船艱難

救護



아침부터 하늘이 맑았다.
배들은 조용히 물 위에 흔들리고 있었고,
장수들도 약속한 대로 모였다.
하지만 보성 군수(김득광)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나는 동상방으로 나와 앉아 순천 부사, 낙안 군수, 광양 현감(어영담)과
전쟁의 일들을 의논하며 뜻을 모았다.

그때였다.
멀리 영남 땅에서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 중엔 김호걸, 김수남이라는 장수들이 있었다.
그들은 도망친 병사들의 이름이 적힌 장부를 들고 와
“여기 있는 여든 명 남짓이 달아났습니다.” 하고 보고했다.

하지만 그들이 숨긴 진실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은 도망친 병사들에게서 뇌물을 받고
일부러 그들을 놓아주고는 잡지 않았던 것이다.


그 사실을 듣는 순간, 내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지금은 전쟁터다.
작은 욕심과 사사로운 이익으로
군율을 어기고 백성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것을
어찌 용서할 수 있겠는가.

나는 조용히 믿을 만한 부하 이봉수와 정사립을 불렀다.
“가서 그 도망자들을 모조리 잡아오너라. 조용하고 신속하게 하라.”

그들은 곧바로 움직였고,
결국 70명 넘는 병사들을 붙잡아왔다.
붙잡힌 병사들은 각 배로 나누어 태웠다.

그리고 오늘 나는 김호걸과 김수남을 군율대로 처형했다.
군법은 이렇듯 엄하고 무섭다.

그들도 내 병사였고 내 백성이었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나는 흔들리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 한순간의 망설임이 수천 명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해가 뉘엿뉘엿 서쪽으로 넘어가던 저녁 무렵,
갑자기 하늘에서 비바람이 몰아쳤다.
그 바람이 얼마나 사나웠던지 모든 배가 흔들리고 뒤엉켜
병사들이 온 힘을 다해 배와 사람을 지켜내느라 밤새 애를 썼다.

바람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이 비바람은 내가 처형한 자들의 슬픈 울음인지,
아니면 차마 눈물을 보일 수 없는 내 마음을
하늘이 대신 울어주는 것인지.

오늘의 일기를 적으며 나는 또 다짐한다.

나는 이 바다 위에서,
어떤 것도 함부로 용서할 수 없는 자리임을.

그래서 오늘 밤, 내 마음도 하늘처럼 울고 있다.









1592년 12월 ~ 1593년 1월(음력), 평양성 수복의 여정

― 《징비록》을 통해 본 전환의 순간 ―


1593년 2월, 이순신 장군이 바다에서 왜적을 막아내고 있던 그 무렵, 육지에서도 조선의 운명을 뒤바꿀 중요한 전환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평양성의 수복입니다.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2년 겨울부터 1593년 초까지, 조선은 명나라와 힘을 합쳐 평양 탈환을 위한 중대한 작전에 나섰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류성룡의 징비록에 기록된 내용을 바탕으로,
1592년 12월부터 1593년 1월(음력) 사이,
조선과 명나라가 평양성을 어떻게 다시 되찾았는지 그 여정을 따라가 보려 합니다.




때는 선조 25년(1592년) 12월이었다.

명나라 조정은 큰 군사를 일으켜, 송응창을 총사령관으로 삼고, 이여송을 장수로 삼아, 압록강을 건너 우리 조선으로 들어왔다.

이때 왜군은 명나라의 심유경이라는 자와 평화협상을 하는 척하면서도 몰래 공격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백성들의 마음은 두려움에 떨었다.

나는 명나라 군대가 안주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이여송을 찾아갔다.

내 소매 속에서 평양성 지도를 꺼내며 말했다.

"제독께서 군사를 이끌고 들어갈 길은 바로 이 길입니다. 왜군은 오직 조총이라는 무기만 믿고 있으나, 우리에겐 대포가 있습니다. 이 포는 오륙 리를 훨씬 날아가니, 왜적이 어찌 버틸 수 있겠습니까?"

제독은 내가 말한 곳을 붉은 붓으로 표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여송은 깊은 밤에 시를 써서 내게 보내왔는데, 그 뜻이 이러했다.

"밤하늘 별빛 아래 군사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으니, 조선 땅이 아직도 평화롭지 못한 소식 듣고 마음 아프네. 임금의 명령 날마다 내려오니, 나는 술 한잔 마음 놓고 마셔본 적 없었네. 봄이 왔어도 싸움의 기운 마음속에 굳세고, 이제 저 왜적의 기운을 꺾으러 가니 등골까지 서늘하구나.

웃으며 말은 하지만 싸움의 어려움 잘 알고, 꿈속에서도 항상 말안장을 놓지 못하네."


명나라 군사는 평양성에 다다라 성을 에워싸고 대포와 불화살을 쏘아댔다.

포 소리는 천지를 흔들고 불길은 하늘을 덮었다.

낙상지와 오유충 등 용맹한 장수들이 병사를 이끌고 성벽을 마치 개미떼처럼 기어올랐다.

적의 칼과 창이 비처럼 쏟아졌으나,

명군은 떨어져도 다시 오르며 끝내 성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왜적은 성 안으로 후퇴하여 방어선을 세우고 총을 마구 쏘아대었기에 명군도 크게 다쳤다.

제독은 궁지에 몰린 적이 끝까지 저항할 것을 걱정해 일부러 퇴로를 열어주었다.

그러자 그날 밤, 왜적은 대동강을 건너 도망쳤다.

나는 왜적의 퇴로를 막기 위해 이시언과 김경로에게 미리 매복을 하라 했으나,

김경로가 망설이며 주저하니 적은 그 틈을 타 멀리 도망쳤다.



왜군은 지쳐 다리를 절고, 밭을 기어 다니며 먹을 것을 구걸할 정도로 형편없었건만,

우리 군사는 제대로 따라잡지 못했다.

이시언만 뒤늦게 따라가 병들어 뒤처진 왜적 몇십 명을 잡았을 뿐이었다.

한양에 머물던 왜적은 평수가라는 자로,

도요토미의 조카였지만 어려서 아무 힘도 없었고,

실제로 군사를 다스리는 고니시는 여전히 붙잡히지 않았다.

카토는 함경도에 남아있으니,

그때 만약 평양에서 도망친 고니시와 그 부하들을 제대로 잡았더라면,

한양의 왜적도 저절로 무너지고 카토 역시 길이 막혀 스스로 도망쳤을 것이다.

한강 이남의 왜적들도 줄줄이 무너지고, 우리 땅은 다시금 깨끗해졌을 텐데,

단 한 번의 결정적인 기회를 놓쳤으니 통탄을 금할 수 없었다. 이 하나의 안타까운 일로, 온 나라의 운명이 다시 흔들리게 되었으니,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는가.


나는 김경로를 처형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당시 나는 평안도의 체찰사였지만, 김경로는 직접 관할 아래 있지 않아 먼저 조정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조정에서는 선전관 이순일(李純一)을 보내 개성부에서 김경로를 처형하라고 명하였다.


그런데 이 사실을 명나라의 제독 이여송에게 알리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김경로의 죄는 당연히 죽어 마땅하오. 하지만 왜적이 아직 다 소탕되지 않았으니 지금 무장을 잃는 것은 아쉬운 일이오. 백의종군 시키고 전공을 세워 죄를 갚게 하는 것이 어떻겠소.”

이에 이여송은 자문을 작성하여 이순일을 통해 보내게 하였다.

한편, 이일(李鎰)을 순변사에서 물리고 이빈(李薲)으로 교체하였다.

평양성 전투 당시 명나라 군은 보통문과 칠성문으로 들어갔고,

이일은 김응서 등과 함께 함구문으로 진입하였다. 그러나 그날 밤 왜군이 몰래 도망쳤고,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이를 알았다.

이여송은 우리 조선군이 경계를 소홀히 해 적을 놓쳤다며 크게 꾸짖었다.

명나라 장수들은 "이일은 장수로서 자질이 없다"며 앞다투어 이빈을 추천했다.

결국 이여송이 올린 보고로 조정에서는 좌의정 윤두수를 보내 이일을 심문하였으나,

결국 처벌하지 않고 풀어주었다.

이빈은 이일을 대신하여 병사 3천 명을 이끌고 명나라 군과 함께 남쪽으로 향했다.



명나라 대군이 평양을 탈환한 뒤, 이여송은 내게 말했다.

“대군이 남쪽으로 향하고 있지만 군량이 부족하다 하오.

그대는 의정부 대신이니 군량 준비에 차질 없게 하시오.”

나는 온 힘을 다해 급히 길을 떠났지만, 이미 길이 파괴되어 있어 산길로 돌아가야 했다. 군량을 미리 준비한 것이 아니었으니, 마음이 근심으로 무거웠다. 다행히 황해도의 감사 유영경이 군량을 마련해 두었으나 왜적을 두려워해 산속에 감춰 놓은 상태였다.

나는 백성들을 독려하여 군량을 신속히 운반하게 하였다.

명나라 대군이 개성부에 입성했지만, 왜적들은 평양 패배에 대한 분노로 한양 백성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관청과 민가를 불태웠다.

나는 이여송에게 신속한 진군을 요청했으나

그는 머뭇거리다가

벽제관에서 싸워 큰 패배를 당했다.


그날 전투에서 왜적은 병력 대부분을 숨겨 놓았고, 명군은 그 수에 겁을 먹었다.

이여송은 전황이 불리해지자 급히 후방 지원을 요청했지만,

이미 병력은 무너져 많은 병사들이 죽고 말았다.


이여송은 이 패배 이후 기력이 크게 떨어져 숨어들어 다시 싸우려 하지 않았다.

그는 결국 핑계를 만들어 군을 후퇴시키고 개성으로 물러났다.

나는 그런 그의 태도에 분노했고,

우리나라가 고생스럽게 모은 군량미로 명나라 군대를 먹이고 있었기에 더욱 마음이 아팠다.

우리 백성과 군사들이 굶주림을 참아가며 어렵게 마련한 식량을 가지고 와서,

한 번 패배하자마자 숨어들어 다시 싸우려 하지 않는 명나라 대군의 모습에 나는 가슴 깊이 통탄하였다.

나는 매일 사람을 보내 이여송에게 진군을 재촉했으나 그는 결국 물러서며 나와 우리 조선을 깊은 실망과 절망 속에 빠뜨리고 말았다.




실제 징비록 원문 내용은 좀 더 길고 세밀합니다

정리, 요약 했음을 알립니다.





국보 징비록(懲毖錄) 원문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국보 징비록(懲毖錄) 원문 180쪽~191쪽 부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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