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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태산이높다하되 Feb 10. 2023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

알고 보니 아동학대 르뽀르따주!

20대 여성이 5살 배기 어린아이에게 주먹질을 한다. 이 잔인한 폭력에 10대 소년도 가세한다. 아이의 입술이 터지고 볼이 부풀어 오르며 몸의 여기저기가 검붉게 멍이 들도록.


그 바통을 이어받는 중년의 남성, 자신의 허리띠를 풀어 저항능력이 전혀 없는 어린아이가 기절을 하도록 매질을 한다. 20대 여성은 아이의 누나고 10대 소년은 형이며, 허리띠로 태형을 가하는 남성은 아이의 아버지다.


사실적인 묘사가 세밀하다 보니 지극히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이 장면은, 소설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 속 한 장면이다.


소설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는 장면. 평소에도 가족들에게 수시로 얻어터지며 지내던, 그러나 밝고 명랑했던 5살짜리 아이, 제제는 누이와 형, 그리고 아비의 잔인한 폭력 앞에 삶의 의욕을 잃게 된다.


1960년대 소설,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는 뽀르뚜까라는 포르투갈 출신 중년 신사와, 브라질의 가난한 어린아이, 제제의 우정과 사랑을 그린 아름다운 이야기로 기억에 남았지만 우연히 다시 읽어보니 60년대 브라질 사회에 만연해 있던 아니 전 세계에 만연해 있던 아동학대를 다룬 소설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쎙떽쥐 베리의 <어린 왕자>가 장미와 지내던 B612호 별을 떠나 다른 행성으로 여행을 다니다가 결국 자신의 별에 남아있던 장미를 생각해 내고 재회하게 된다는 아름다운 이야기인 줄 알았지만 사실은 어른들이 만든 모순투성이 사회와 세상을 고발하고 있는 소설로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어린이는 어른의 거울이라고 했던가. 어린이들은 어른의 모든 것들을 따라 한다. 모방은 인간의 천성이기 때문이다. 술 마시고 도박하고 여성을 착취하고 아동을 학대하는 어른들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아이들이 올곧은 심성을 유지하기는 어렵다.


여성착취와 아동학대는 결국, 가부장 사회에서 남성들이 자신을 투사하게 되면서 폭력으로 이어진다. 자신을 자신이 학대하는 셈인 줄도 모르고. 그런데 반세기도 더 전에 지어진 소설의 내용이 21세기인 지금에도 여전히 와닿는다. 남의 일같지가 않다.


뽀르뚜까는 현실에서는 없는 이상향 같은 존재다. 돈 많은 부호가 가난에 찌들어 사는 어린아이에게 호의(시혜)를 베풀 수는 있어도 우정과 사랑을 나누며 부자지간의 정을 나누는 정도까지 관계를 발전시키는 일은 없다. 제제의 꿈이었다.


매질과 욕설의 소용돌이 속에 살던 제제가 꾼 꿈속에 나타났던 신사 뽀르뚜까는 결국 제제 자신이 그리던 이상적 아버지 모습은 아니었을까.


이웃 에드문드 아저씨나 글로리아 누나, 쎄실리아 선생님, 그리고 악보를 팔던 아리오발두 아저씨 같은 사람들처럼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 제제에게도 나와 같은 독자에게도 천사처럼 보인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인격은 다중적이다.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불안정이 지속되면 그 다중적 인격들 중에서 좋지 않은 것들이 도드라질 우려가 있다. 정치도 사회도 경제도 안정을 찾아야 하는 이유다. 약자들이 고통을 받으면 결국, 부자나 사회적 고위층들에게도 좋을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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