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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태산이높다하되 Apr 26. 2023

김약국의 딸들

세 번째 읽고

요즘 이 소설을 찾은 이유를 생각해 본다. 비극, 도리없이 당하게 되고 마는 슬픔이다. 소설을 다시 읽으면서 서사가 이해되고 등장하는 서민들의 비극이 일제치하에서 실재했음을 알게 된다. 나라가 일본에 넘어가는 과정과 식민국으로서의 설움이 주인공들에게 투영되어 있기 때문인가. 비극과 슬픔은 현재진행형이다.


난폭한 성미를 타고난 난봉꾼, 봉룡은 자신의 아내를 의심해 매질을 하고 자신의 아내를 사모한 남자를 살해한다. 아내는 비상을 먹고 죽는다. 살인죄인이 된 봉룡은 형, 봉제가 마련한 수단으로 멀리 떠나고 어린 아들 성수만 남게 되는데... 구한말 민비가 시해되던 즈음에 '조선의 나폴리'라 불리던 통영에서 일어난 일이다.


봉룡의 아들, 성수는 백부인 봉제의 아들로 입양되어 우여곡절 끝에 약국의 주인이 된다. 소설 <김약국의 딸들>에서 김약국은 성수다. 소설은 그의 아내와 다섯 딸이 겪을 수밖에 없었던 처참한 운명을 그리고 있다.


첫딸 용숙은 과부가 된다. 유부남이던 의사와 바람이 나고 통영바닥에서 화냥년으로 낙인찍히지만 개의치 않고 매점매석과 고리대금으로 거부가 된다. 둘째는 용빈, 선이 굵고 용모가 뛰어나며 머리도 좋아 여느 집 맏아들처럼 김약국의 의논 상대가 된다. 그리고 서울서 교사가 된다. 통영의 갑부 정국주의 아들, 홍섭과 혼담이 오가다가 김약국의 사업이 기울자 파혼당한다.


셋째는 문제적 인물 용란, 무당이 낳았다고 알려진 근본 없는 인물이자 김약국의 머슴이 되는 한돌과 사랑에 빠지는 바람에 김약국의 집에 암운을 드리우는 인물이다. 넷째는 용옥, 서기두라는 남성과 결혼한다. 박색이지만 속이 꽉 찬 여성이다. 용란과 혼담이 오가던 기두는 한돌과 몸을 섞은 용란을 뒤로 한채 마음에 없던 용옥과 결혼을 하게 된다. 다섯째 용혜는 철부지 어린이다. 부모와 언니가 없는 통영을 뒤로 한채 언니 용빈을 좇아 상경한다.


역사의 도도한 흐름은 거스를 수가 없다. 과거의 백성들, 오늘날의 서민은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나아지지 않는 삶에 절망한다. 예수와 부처를 찾고 도덕과 윤리를 부르짖으며 사소한 잘못마저도 뉘우치고 빌고 또 빌지만 비참한 삶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문제는 역사가 이들 가난하고도 무지한 민초들을 밟고 전진한다는 사실이다.

저자 박경리(1926-2008)

봉제의 집에서 그의 딸 연순이 택진과 혼례를 치르던 날 부엌에서 은수저를 훔치며 혼잣말로 저주를 퍼붓던 마을 아낙 안동댁, 그녀의 아들이 정국주다. 김약국의 전답을 저당 잡았다가 앗아가는 인물이며 자신의 아들 홍섭이 용빈에게 장가들지 못하도록 한 인물이기도 하다. 통영의 거부가 되고 유지가 된다. 친일파다.


김약국이 벌인 사업을 도맡아 관장하던 서기두의 아비 서영감은 아들과 달리 몹시 야비한 짐승과도 같은 인물로 형상화된다. 그는 자신의 아들, 기두가 부산으로 일을 하러 간 틈에, 아이 낳고 집안 살림을 야무지게 하던 며느리 용옥에 대한 겁탈을 시도한다.


용옥의 반항에 욕정이 좌절되자 되려 용옥이 시아버지가 되는 자신의 방에 들어와 몸을 섞으려 했다는 식으로 용옥을 협박한다. 시아버지를 피해 도망치듯 아이를 둘러업고 난생처음 배를 타고 부산에 가는 용옥, 남편과 엇갈리고 다시 배를 타고 통영으로 돌아오는 중에 배가 침몰한다. 용옥은 배와 함께 불귀의 객이 된다. 서영감에 의한 타살이지만 증거는 없다.


키워준 은혜에 배은 했다며 한돌을 쫓아내는 김약국, 몸이 더럽혀졌다는 이유로 용란을 아편쟁이, 연학한테 시집보낸다. 용란의 남편, 연학은 살림살이를 죄다 갖다 팔아서 아편을 맞는다. 마취가 풀리면 용란에게 온갖 패악질을 일삼는다.


다시 나타난 한돌과 만남을 이어가게 되는 용란을 보면서 어미 한실댁은 한돌과 용란에게 패물을 주어 이들을 야반도주시킬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무당의 예언대로 한실댁과 한돌은 아편쟁이 연학에게 무참히 살해된다.


삶은 누구에게나 길흉화복이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김약국의 주변 사람들에게는 그렇지가 않다. 한없는 나락으로 떨어진다. 소설을 읽는 동안, 단 한 번도 희망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 없었다. 용빈과 대화를 나누던 독립운동가, 강극은 용빈의 처참한 사연을 듣고 말한다.


"그러니까 퍽 오래된 얘기군요. 그것을 본 기억은 희미하지만 후일에 그 얘기를 몇 번, 아니 수백 번이나 들었어요. 저의 아버지는 혁명가도 아니었고 우국지사도 아니었어요. 다만 부자였지요. 그 아버지가 왜놈들에게 타살된 거예요. 머슴이 시체를 말아 태워가지고 왔더군요. 지금은 어슴푸레한 기억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제게 누이가 있었습니다. 그 누이가 지금 왜놈하고 살고 있단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용빈 씨 혼자만 비극을 짊어지고 있는 건 아니죠."


일본의 압제에서 희망은 없었다. 수많은 국민들은 참기 힘든 고통 속에서 신음하며 살아야 했다. 저자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에서 자주 등장하는 민초들의 한마디가 더욱 와닿는 요즘이다. "하늘과 땅이 그만 딱 붙어버렸으면 좋겠다." 절망이 골고루 분배되는 세상에 희망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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